지금 막 어머니가 운명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순간 나는 어찔해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심장을 강하게 틀어막았다. 어머니가 날카로운 비수로 내 심장 한 가운데를 깊숙이 찔러 피가 솟구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죽음으로 내게 복수를 하셨다. 젊은 날 어머니의 심장에 칼을 꽂았던 나에게 저 세상으로 가시면서 복수의 잽을 크게 날린 것이다. 나는 주저앉은 채 어찌해야 할 지 한참 생각했다.
오늘은 마흔에 가까운 아들 결혼식 날이다. 올림머리로 단장하기 위해 머리를 기른 아내는 아침 일찍 딸과 함께 미장원에 갔고, 주인공인 아들은 웨딩 대행업체에서 서비스 해주는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일찍 나갔다. 나는 목욕탕에 들렀다가 예식장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때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간병인이 아침을 드리기 위해 가보니 어머니가 숨을 쉬지 않더라는 것이다.
치매가 시작되자 사남매는 돌아가면서 어머니를 두 달씩 집에 모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그것은 어머니의 뜻이었다. 절대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단호한 의지였다. 어머니에게 자식은 신앙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곳으로 모실 때까지만 해도 나는 어머니가 10년을 그곳에서 사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죄스러움에 하루가 멀다 하고 어머니를 찾아 다녔지만, 점점 뜸해갔고 한 달에 한 번이 두 달에 한번이 되고, 세 달이 되고, 최근 몇 년은 생신날과 어버이날만 어머니께 갔다. 지난 봄 87세 생신 때 찾아뵙고 어버이날 한 번 더 찾아뵈었으니 10개월이 되어간다. 그렇다. 어머니 뵌 지가 10개월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운명하셨다. 그것도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 손자 결혼식 날 아침에.....
아들이 이십 대에 들어서부터 어머니는 자나 깨나 손자를 결혼시키고 싶어 성화를 했다. 하지만 아들은 삼십이 되고 마흔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도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더니 어느 날 아가씨 하나를 데리고 와서 콩 구워 먹듯이 결혼하겠다고 서둘렀다. 혹시 임신을 한 것인가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아가씨의 배경이 좋은 것도, 그렇다고 예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전문대 나와 어린이집 선생을 한다는 특별한 것 없이 평범한 여자였다. 가뜩이나 마땅치 않은 결혼인데 이렇게 큰일이 터진 것이다.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던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언제나 그렇듯이 적절한 방법을 제시해줄 것이다.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째야 비로소 전화를 받았다.
“ 여보! 글쎄...글쎄 말이야.”
나는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 왜요? 어머니가 위독하시대요?”
아내가 급하게 물었다.
“ 아 아니.....”
“ 그럼 됐어요..”
아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운명하셨대.”
“.......”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나만 알고 있어요. 새신랑한데는 결혼식 끝나고 알려요. 모든 절차는 동생들한테 맡기고 우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식을 마쳐요. 알았죠? 여보 결혼식 끝날 때까지는 아무 일 없는 거예요.”
아내는 마음이 약한 내가 번복이나 할까봐 다짐하고 또 다짐을 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찾아뵙는 어머니의 존재가 아들의 첫 출발을 늦추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럴까 말까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내게 아내는 빠르게 결정해 주었다. 아내가 고마웠다.
물론 결혼식을 준비하며 문득문득 이런 불길한 상황을 예측 못했던 것은 아니다. 젊은 날 우리 사남매는 앞서 거니 뒤서 거니 다투며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또 그렇게 모두 자식을 둘씩 낳았다. 둘째인 딸이 태어나던 해에 어머니는 친 손주 외 손주 합쳐 손주를 셋이나 보았다. 아기들 백일과 돌 역시 정신없이 지나가더니 결혼식 역시 그렇게 다투어가며 치렀다. 어머니가 노인병원에 가시고 나서 10년 사이 집안의 모든 혼사가 치러졌다. 마치 어머니가 집안의 모든 혼사를 막고 있었다는 듯이..... 그때마다 그런 불길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모두 무사히 지났다.
제일 마지막인 아들 혼사도 그렇게 무사히 지날 줄 알았다. 그래도 불길한 생각이 들 때면 요즘 의술로는 하루 이틀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았다. 그런데 아침에 어머니는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잠자듯이 가셨다고 했다.
여느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결혼식은 진행되었다. 예식이 시작 되자 신랑신부 어머니가 곱게 꽃단장하고 손을 잡고 걸어 나왔다. 아내는 이날을 위해 보톡스 주사를 맞고 정액권을 끊어 피부 마사지를 다녔다. 한복으로 화려하게 성장한 안사돈끼리 단상에 올라가 그곳에 장식된 초에 불을 켰다. 밀랍인형이라도 된 듯 육십 대 중반을 넘기고 있는 아내에게서는 나이를 느낄 수 없었다. 걸어서 혼주 석으로 들어갈 때 아내는 치마폭을 밟아서인지 한 번 비틀 하는 것 같더니 이내 아무 일 없이 그 일을 해 냈다.
신랑 입장 순서가 되자 신랑은 그리 급한지 순식간에 걸어 나오면서 손을 들어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화답했다. 좀 민망하긴 했어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신부입장 순서였다.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웨딩마치에 맞춰 걸어 나왔다. 신부는 방글방글 웃으며 온갖 하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눈인사는 물론이고 심지어 어떤 이에게는 말까지 건넸다. 예전에는 신부가 다소곳이 눈을 내리깔고 아버지 손을 잡고 섭섭해 어쩌지 못하는 태도로 천천히 걸어 나왔었다. 저런 신부의 태도는 경박하다 못해 망측하기 까지 했다. 내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곁으로 보면 이 결혼식이 진행 되도록 신랑 아버지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결혼이 진행되는 동안 요즘 결혼은 신랑 아버지 혼자 뒤집어쓰는 독박이란 것을 알았다. 신부 측에서는 형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서울 근교에 집을 하나 마련하는데도 수억이 들었다. 아내가 가게를 세놓고 모아놨던 노후 자금을 탈탈 털었다. 제 동생과 사촌들은 모두 집을 사고 안정되게 살고 있는데 가장 늦게 출발하는 맏인 장손이 이리 저리 셋집을 옮겨 다니며 사는 것은 상상만 해도 싫었다. 집값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지금 안사면 영영 집장만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며느리 쪽 도움 없이 그걸 혼자 뒤집어쓰려니 힘에 겨웠다. 무리를 해서 아들 집을 장만해주었더니 여유 있다고 생각했던 내 노후가 갑자기 불안해왔다.
주례는 사회자로부터 될 수 있으면 짧게 해 달라는 부탁을 들었다며 짧게 할 듯 했다. 그러나 주례사는 끝날 듯 연결이 되고 끝날 듯 연결이 되었다. 요즘은 주례를 생략하기도 한다는데 아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고등학교 담임을 모셔왔다. 나는 주례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어서 빨리 이 결혼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시신을 영안실에 안치해 놓고 결혼식을 올리는 이 어이없는 상황이 꼭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렸을 때 그들의 반응을 생각하니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하객들이 와르르 웃고 나서 식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어머니의 나에 대한, 아니 자식에 대한 집착은 병에 가까웠다. 당시는 너도나도 병에 김치를 담고, 양철 도시락에 밥을 싸오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일제 보온 도시락 통에 장조림과 달걀말이를 매일 넣어주셨다. 부잣집 애들만이 싸 올 수 있는 반찬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구제물자 중 고급스럽고 좋은 옷들만 입히고 미제 물감과 연필만 쓰게 하고 미제 과자와 초콜릿만 먹였다. 주위에서 나는 부잣집 도령으로 알려졌다. 나약하게 생긴 부잣집 도령은 학교 폭력배들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나는 매일 어머니 포목점 금고에서 돈을 훔쳐다가 그들에게 바쳐야했다. 부모님께 알리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들은 진짜 죽일 기세였다.
나는 겁에 질려 학교에 결석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간다고 하고 공원을 배회하기도 하고 기차를 타고 지방 도시를 순례하기도 했다. 어느 날 그들은 포목점 앞에서 공원을 배회하다가 돌아오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근처 공터로 끌고 갔다.
다섯 명이 둘러서서 내게 준비해 온 개똥을 먹으라고 했다. 그걸 먹지 않으면 대신 내 성기를 까겠다고 협박했다. 한 손으로는 바지춤을 움켜쥐고 한 손으로는 입을 막고 필사적으로 거절했다. 그들은 발로 이리 차고 저리 차며 그럼 개처럼 기어 다니라 했다. 나는 그들 앞에 개처럼 기었다. 돈을 가져오겠다고 약속을 할 때까지 기라고 했다. 결국 돈을 가져다주겠다는 약속을 한 다음 그들에게서 풀려났다.
그날 이후 나는 이층으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살림집은 포목점 이층에 있었다. 포목점 안을 가로지르면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이층에 틀어박혀 말도 하지 않고 학교 가기도 거부한 채 거의 1년을 지냈다. 아무도 없는데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우울이 다정한 친구처럼 자주 찾아왔다. 밥맛이 없고 잠을 자다가도 악몽을 꾸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 한 생각이 들었다. 환청까지 들렸다.
어머니가 나를 강제로 2층에서 끌어내리려고 했다. 찔러. 찔러.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부엌으로 가 칼을 꺼내 들고 어머니의 가슴을 찔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머니의 가슴에서 피가 솟았다. 도망가려고 할 때 어머니가 내 팔을 강하게 잡았다. 네가 찌른 것이 아니고 내가 실수로 내 가슴을 찌른 거야. 넌 그렇게 알고 있어. 피가 치솟는 가슴을 부여안고 어머니는 말했다. 어머니를 뿌리치며 층계를 내려가려는 내게 어머니는 두 번 세 번 대답할 때가지 당부했다. 구급차가 오고 어머니는 입원을 했다. 경찰이 찾아왔다. 나는 어머니가 말한 대로 내가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경찰은 어떻게 자신의 심장을 찌를 수 있냐고 다그쳤지만 내가 말을 듣지 않자 속이 상한 어머니가 자해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계속 의심하는 경찰에게 어머니가 봉투를 전달한 후 그 일은 마무리 되었다. 어머니는 일주일 후에 퇴원했다.
나는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 정신분열 초기라고 했다. 처방전에 적어준 약을 꾸준히 복용했다. 주위 사람들 특히 어머니의 배려와 사랑으로 일 년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신랑신부가 부모께 드리는 인사가 끝나자 신부 측 친구로부터 축하공연이 있다고 했다. 여자 남자 애들이 주르르 나와 섰다. 음악이 나오자 그들은 섹시한 모습으로 몸을 비틀어가며 춤을 추었다. 인간의 몸이 저렇듯 따로따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음악에 맞춰 신랑신부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나고 일부는 사회자 앞까지 달려가 그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예식 전에 사회자에게 사정이 있으니 주례사를 짧게 하고 축하공연은 가급적 생략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었다. 사회자는 분명 알았다고 했다. 내 말을 무시한 사회자가 야속했다.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공연이 끝나자 더 망측스런 일이 일어났다. 신랑이 신부에게 노래를 바치겠단다. 신부는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신랑을 쳐다보고 섰고 신랑은 마이크를 잡고 신부의 눈길에 화답하듯 노래를 불렀다. 꽃길만 걷게 해 줄게. 네 맘에 꼭 들게 해 줄게 어쩌고 하며 아들은 목청을 올렸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꼭꼭 숨고 싶었다.
드디어 식이 끝났다.
사회자에게 어머니의 운명 소식이 적힌 쪽지를 전하자 사회자가 침울한 표정으로 축하객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낮고 긴 탄식이 식장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마치 월드컵 축구 결승전에서 자기 팀 골키퍼에게 보낸 공이 골대 안으로 굴러들어가 자살골이 되었을 때 관중이 내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웅성거렸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결혼식장에서 급히 봉투 하나를 더 마련해 빈소에 들러, 상주인 나보다 빨리 도착한 조문객들이 꽤 있었다. 동생 영길이와 영호 그리고 여동생 영미가 빈소를 꾸며놓고 조문객을 받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장조카 결혼식에 형제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미 십년 전 요양원에 보내드릴 때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10년 동안 어머니를 보내 드릴 마음의 준비를 해 왔기 때문에 그때만큼 슬프지 않았다. 아니 오늘이 결혼식 날만 아니라면 화장실에 들어가서라도 웃고 싶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망가지고 죽어가는 어머니를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홀가분했을 것이다.
요양원에 가시던 날 여동생 영미는 어머니의 속옷을 챙기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어머니는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설레는 얼굴로 영미를 해맑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치매는 말하자면 고운 치매다. 욕 한번 안하시고 언제나 생글거리며 웃으셨다. 그렇게 웃으실 때면 해맑은 얼굴에 주름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젊은 날엔 참으로 고왔을 어머니였다.
평생 포목장사를 하신 어머니는 포목을 나르듯이 온갖 물건들을 이리저리 옮기며 처음 치매증상을 보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장롱도 혼자 힘으로 옮겼다. 제 자리에 붙어있는 물건들이 없었다. 그리고 꼭두새벽이면 일어나 시장 골목을 돌아다니며 밥 하라고 동네 사람들을 깨웠다. 시장 사람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그 뿐 아니었다. 물건들을 어딘가 꼭꼭 숨겼다. 특히 베개를 잘 숨겼다. 숨기고, 꽁꽁 또 숨기고, 그리고 당신은 맨 땅에 머리를 대고 주무셨다. 어쩌다가 베개가 보일 때는 띠를 두르고 아기처럼 업고 계셨다. 어머니는 시집오면서부터 포목점을 하여 집에는 늘 애 보던 사람이 있었다. 자식을 낳기만 했을 뿐 우리 사 남매는 유모 손에 자랐다. 우유를 먹고 자라야 더 튼튼하다는 당시의 잘못된 인식으로 우리 사남매는 우유를 먹고 자랐다. 어머니 젖꼭지를 빨아본 적이 없었다. 장사하는 어머니 등에 업힌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베개를 아기처럼 업고 계셨다.
그런대로 안면이 있는 외사촌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렸다. 외사촌은 외가 친척들에게는 자기가 알리겠으니 신경을 쓰지 말라고 했다. 얼마 후 외사촌의 부음을 들었는지 문상객들이 꾸역꾸역 몰려왔다.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몰려온 대부분 외가 친척들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팔남매의 맏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아버지 즉 외할아버지는 구남매의 맏이다. 그들 대부분은 어머니가 출가하기 전 시골에서 함께 자랐다는 외가 친척들이었다.
우리 사남매는 어찌된 연유에선지 외가 친척들과 교류를 하지 않고 살았다. 많지 않은 친가 친척들은 그런대로 왕래했지만 어머니는 당신의 형제자매 뿐 아니라 어머니의 사촌들과도 거의 왕래하지 않았다. 가끔 막내 외삼촌이 찾아와 어머니께 무언가 부탁을 하면 어머니는 냉정히 거절했다. 막내 외삼촌은 외할아버지 땅을 팔아 사업한다고 돌아다니다가 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집안에서 내 놓은 그런 막내 외삼촌이 툭 하면 어머니를 찾아와 손을 벌렸다.
내가 모르는 어머니의 친척들은 어머니 영정에 절을 했다. 그리고 상주에게 인사를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조문객들은 둘째 할아버지네 막내다. 작은 외삼촌 댁 둘째다. 막내 할아버지네 둘째다. 자신들 소개는 대부분 그랬다. 어머니의 사촌형제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맏인 어머니보다 나이 어린 작은 할아버지와 왕고모님도 계셨다. 나는 그들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도 족보조차 따져지지 않았다. 그저 연신 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그들은 어릴 때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뛰어놀며 자랐다고 말하며 어머니를 추억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포목점을 하여 돈을 마음대로 만질 수 있었다. 당시에 혼수로 한복감을 넣었다. 형제가 많으면 형제 수대로 한복감을 넣었다. 그 시절이 지나자 양복감이나 양장감을 넣었다. 포목점의 전성시대에 어머니는 돈을 끌어 모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귀공자처럼 키웠다. 우리는 누구와 놀 틈이 없었다. 학교에서 오면 과외 다니기 바빴다. 어머니는 사촌들과도 철저히 차별하여 키웠다. 특히 가난한 시골 출신의 외가의 사촌들과는 접촉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것이 돈이 누리는 특권이라 여겼다. 그렇지만 가끔 어려운 친척들을 돌보는 것 같았다. 나는 도중에 고등학교 중퇴했지만 영길이는 의사고 영호는 교수다. 영미는 어머니가 사시 패스한 신랑감을 골라 아파트에 승용차까지 딸려 시집을 보냈다.
외가 식구들은 한 결 같이 키 크고 마르고 얼굴이 동그랗고 조막만하다. 어디다 내 놔도 외가 식구들을 골라낼 수 있을 듯 보였다. 그들 중 유독 어머니와 비슷한 외모의 여자가 눈에 띄었다. 여자는 검은 정장 옷을 입었다. 입관 전이라 그저 검은 계통의 옷을 입은 우리 형제들과 달리 여자의 옷은 상복으로 훌륭했다. 사촌 이모인가. 사촌이모는 저리 정성껏 검은색 정장을 차려 입지 않을 것이다. 나이는 대충 육십 대 중후반정도. 막내외삼촌 보다 젊지는 않고 또래처럼 보였다.
여자는 친척들이 모여 앉은 곳에서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 익숙하게 친척들과 교감을 했다. 그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고, 손잡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우리가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막내 외삼촌과는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여자가 어머니를 조문하기 위해 빈소로 들어갔다. 구경이라도 난 듯 친척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하여 대접하던 손님을 앉혀놓고 빈소로 들어갔다.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이하던 영길이와 영호가 여자를 맞이했다. 제수씨도 영미와 매제도 모두 다 빈소로 들어왔다.
여자는 국화 한 송이를 어머니 영전 앞에 놓더니 정성 드려 크게 두 번 절을 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앉아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어머니’ 하며 영안실이 떠내려갈 듯 큰 소리로 땅을 치며 곡을 했다. 빈소에서 처음으로 울린 곡이었다.
어느 순간 여자가 울음을 그치더니 상제들을 향해 앉았다.
" 네가 큰 애 영재냐? 너 학생 때 교복입고 다니는 거 봤다. 포목점에 가서 몇 번 봤어. 너 결혼 할 때도 가서 봤지. 네가 영재 댁이지. 언젠가 내가 포목점에 갔을 때 마주친 적이 있었지.”
그러고 보니 언젠가 아내에게서 들었던 것 같다. 포목점에서 누군가를 만났는데 어머니와 인상이 비슷해서 누구냐고 물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고향 사람이라고 서둘러 돌려보냈다는 얘기를 아내로부터 들었던 적이 있다.
여자는 우리를 하나하나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둘째 영길이로구나. 의사 선생님이지. 어머니가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알고 있다. 셋째는 대학교수님. 너 대학생 때 엄마와 함께 막내 외삼촌 집에 온 걸 봤어. 그리고 너 영미.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너와 나를 돌아가시기 전에 대면시켜 주신다고 약속하고서는 그냥 가셨다. 어머니가 반대하셨겠지. 먼발치에서는 몇 번 봤지만 이렇게 가까이 보기는 첨이구나.”
여자는 돌아가며 아는 체를 하더니 맨 마지막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도 너희들처럼 어머니 딸이다. 비록 인정받지 못했지만 어머니 스무 살에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딸이야.”
주위가 잠시 소란스러웠다. 여자의 말을 듣고는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 그럴 리가요.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아무나 딸이라고 우기네요. 우린 안 믿어요.”
그때 외사촌이 조용히 나섰다.
“ 형 이 누나 말 맞아. 이 분도 큰고모님 딸이야. 형네 형제들만 모르지 우린 다 알고 있어.”
우리 형제만 모르고 있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종 사촌이라는, 외사촌이라는, 어머니의 사촌이라는 사람들이 우리 형제들을 빙 둘러서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 여자가 어머니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달라고 동정을 구하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모두 다 여자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언니 어떻게 연락을 받고 왔어. 누나 이럴 줄 알았어. 그간 얼마나 서럽게 살았어. 둘러 선 친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자에게 한마디씩 던졌다. 어쩜 어머니는 저 여자 때문에 우리 형제들이 외가와 담을 쌓고 살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 혼주가 바로 장례식장의 상주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까무러칠 일인데 어머니가 스물에 낳은 딸이라는 여자가 나타났다. 지금 내 눈 앞에 일어난 이 일을 정말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워 할 틈도 없이 사람들은 꾸역꾸역 몰려왔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친척들과 교류하는 일도 없이 이기적으로 키웠다. 친척들 장례식뿐만 아니라 친구들 궂은일에도 잘 다니지 않았다. 겨우 사돈댁에서 오고 직장에서 친한 친구 몇 명 왔다가 갔다. 영길이는 의사협회에서 몇 명이 다녀가곤 손님이 없었다. 지방대학 교수인 막내 영호의 직장동료들은 대표로 몇몇 사람들만 왔다 갔을 뿐이다. 친가는 아버지가 오대 독자라 친척이 거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 외가 친척들이었다. 몰려드는 그들 중 어처구니없게도 아는 사람이 별거의 없었다. 나는 외가 뿐 아니라 이모네나 외삼촌댁에도 한 번 가 본적이 없다.
더 어이없는 일은 오늘 처음 우리 눈앞에 나타난 여자가 외가 손님들에게 음식을 접대했다. 게다가 주방 도우미들도 음식이 떨어지면 여자에게 가서 주문서에 사인을 받았다.
우리 사남매는 귀퉁이에 서서 멀끔히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너는 알고 있었니?”
의외로 담담한 얼굴을 보이고 있는 영미에게 물었다.
영미는 알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성이 다른 딸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노인 병원으로 어머니 면회를 갔을 때였다.
“조금 아까 막 언니가 다녀갔어요.”
간병인은 언니에게 연락해서 함께 오지 그랬냐는 투로 말했다.
“웬 언니요? 전 언니 없어요.”
“설마요. 언니는 엄마를 쏙 빼 닮았는데요. 동생은 아빠 닮았나 봐요.”
“언니 없다니까요.”
영미는 간병인에게 짜증을 냈다.
“분명히 딸이라고 그랬어요. 할머니가 스물에 난 딸이라고요. 조금 아까 막 갔어요.”
영미가 소망의 동산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을 해서 오 분쯤 달렸을 때 은회색 승용차와 만났다. 그곳은 시골길이라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곳이었다. 영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며 주춤하고 서 있었다. 다행이 은회색 승용차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더니 공터로 비켜서 주었다. 영미는 승용차 앞을 지나며 고개를 숙여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보니 얼굴을 반쯤 가린 선글라스를 쓴 여자였다. 어머니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단정히 빗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늘 따라 정신이 말짱했다.
“엄마! 지금 왔다가 간 여자 누구야?”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간병인 말대로 엄마 딸이야?”
어머니는 눈을 한번 움찔 했을 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영미는 창가로 가서 창밖을 내다봤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가 한번 그 사람 만나 볼까?”
한참 후 영미가 말했다.
“ 그럴 필요 없다. 너희들은 그 애를 모르는 거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돼. 난 천하에 잡놈의 딸인 걔를 내 귀한 자식 너희와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어. 걔로 인해 내가 당한 수모는 죽어도 잊을 수가 없어.”
어머니는 정신이 멀쩡해서 단호히 말했다.
어머니는 그 여자에 대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영미가 물으면 침묵으로 일관했다. 영미도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영미가 차분히 여자의 존재에 대해 안 경위를 형제들에게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집히는 데가 있어.”
영길이가 말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웬 여자가 악을 쓰고 있었어. 나도 피해자라고. 나를 인정해 달란 말이야. 내가 확실하게 들은 소리는 그 두 마디 뿐이었어. 여자는 울부짖고 있었어. 문을 열었지. 어머니는 싸늘한 얼굴로 여자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고 여자는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어. 그 광경이 살벌하기도 했고 기이하기도 했어. 내가 누구냐고 소리쳤어. 허겁지겁 분위기를 수습하고 있는 여자를 쳐다보며 어머니가 말했어. 내 돈을 꿔간 빚쟁이다. 이자를 감해 달래서 못한다고 그랬다. 어머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어. 여자는 어머니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휭하니 나가버렸어. 여자의 뒷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듯 낯익었어. 이상하게 오래 된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어. 한없이 인자한 어머니에게 그토록 차가운 얼굴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어.”
나도 어머니에 대해 의아해한 것이 있었다. 스물 두 살의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가 첫 결혼에 실패한 나이 많고 무능한 아버지와 결혼 한 것이다. 그때마다 수긍할 수 있었던 것은 가게였다. 할머니는 어머니와 결혼 시킬 때 아버지에게 목이 좋은 가게를 준 것이다. 누군가에게 들은 말로는 할머니는 어머니의 장사 능력을 철저하게 검증을 했다고 했다. 가게를 운영하며 어머니는 할머니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가게를 운영하며 우리들을 공부 시켰을 뿐 아니라 아들 딸 모두 집을 사서 결혼을 시켰던 것이다. 결국 할머니와 똑같은 방식으로 어머니는 나에게 가게를 넘겼다.
내가 정신병원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는 포목 가게 문을 닫고 한창 뜨고 있는 메이커 옷집으로 바꿨다. 그리고 젊은 여자 점원을 두었다. 어머니는 직원을 수시로 갈아치웠다. 그러다가 가난하지만 똑똑하고 인물까지 참한 섬에서 온 아가씨로 낙찰을 보았다. 그 아가씨에게는 주인집 우리 형제들이 하늘의 별처럼 높은 존재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정신병원에서 꾸준히 치료받고 나온 나에게 가게를 맡기고 손을 떼었다. 나는 아가씨와 사귀었다. 아가씨와 사귀고부터 나의 병은 차츰 나아갔다. 그 아가씨가 지금의 내 아내다. 아내는 예쁘고 똑똑하고 성격까지 좋아 나를 잘 다루며 참고 인내하는 데는 선수다. 물론 가게를 운영하는데도 능력이 있었다. 할머니처럼 어머니도 완벽하게 테스트를 한 끝에 며느리를 골랐다.
밤이 깊어가자 조문객들은 서둘러 다 돌아가고 우리 사남매 내외와 어머니 딸이라는 여자와 그리고 우리 형제들이 제일 탐탁치 않아했던 막내외삼촌부부가 상가에 남았다.
“너희도 알다시피 내가 누님 속 많이 썩혔지. 용서해라. 사업에 실패하고 먹고 살 대책이 없어 그랬으니 누님도 용서할 줄 안다. 내가 너의 엄마에게 돈을 요구할 때마다 들먹인 것은 이 조카였다. 숨겨 놓은 딸의 존재를 알리겠다고 협박도 했었지. 그때마다 누님은 돈을 조금씩 주더라. 어지간히 조카를 팔아먹었어. 미안해 조카. 누님 미안합니다.”
막내 외삼촌은 마치 어머니가 곁에 있는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사과를 했다.
“우리 엄마는 스물 둘에 시집오셨는데 그 사이 숨겨놓은 딸이 있다는 건 믿어지지 않아요.”
나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항의 하듯이 외삼촌에게 말했다.
“큰누이는 스물에 시집을 갔어. 친정에 아기 낳으러 왔다가 눈이 쌓여 돌아가지 못하자 그 사이 남편이란 사람은 딴 여자와 살림을 살고 있었지. 큰누이는 조카와 함께 그렇게 소박을 맞았어. 생각해 봐라. 누님은 우리 집안에서 개혼일 뿐 아니라 할아버지 형제들에게도 처음인 혼사였지. 얼마나 주목받는 결혼이었겠냐. 실패하자 죽겠다고 물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약을 먹기도 했단다. 나도 들은 얘기지만..... ”
외삼촌이 예전 얘기를 하자 여자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 조카가 외가에 온 지 육 개월 후에 내가 태어났다고 해. 우린 조카와 삼촌이지만 쌍둥이처럼 자랐지. 이듬해 누님에게 중매가 들어오자 어머니는 조카를 외가에 맡기고 시집을 간 거야. 조카가 돌쟁이 때, 그러니까 내가 육 개월 정도 되었을 때 일이야.”
막내외삼촌의 말이 끝나자 외숙모가 말을 이었다.
“조카님은 늘 우리 집 옆에 살았어요. 어머니 소식을 듣기 위해서였지요. 그래서 큰 시누이님이 요양원에 가신 것도 오늘 타계하신 것도 금방 들을 수가 있었지요.”
나보다도 여섯 살이나 어리다는 막내외삼촌댁은 조카들에게 경어를 썼다.
“조카는 우리 집에서 자라다가 학교 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에게 갔지. 나와 쌍둥이처럼 한 집에서 함께 살다가 가던 날, 울면서 십리 길을 걸어 버스 정류장까지 갔던 것이 지금도 생각나. 버스는 왔는데 조카는 안 간다고 나를 붙들고 울고 나 역시 가지 말라고 울고..... 일곱 살인데 뭘 안다고 그리 서럽게 울었는지.”
막내 외삼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럽게 울던 여자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천벌을 받았는지.... 새 엄마란 사람은..... 내가 4학년 때 죽었어. 결핵이었어.....이듬해 아버지 역시 그 병으로 죽더라. 혼자된 내가 갈 곳은.... 외가밖에 없었어. 외가로 내려갔지. 외할머니가 불쌍하다고 각별히 보살펴 주셨어.”
여자는 설음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마을은 권 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 아니냐. 그곳에서 우린 한식구나 마찬가지로 뒹굴며 살았어.”
외삼촌의 말이 끝나자 영미가 물었다.
“그럼 어머니가 보살펴 주었단 말이에요?”
“아니지. 그랬으면 조카가 저렇게 서럽지는 않았을 거야. 누님은 철저히 당신 딸을 외면했어.”
외삼촌은 산 증인이나 되는 듯이 말했다. 여자가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막내 영호 네가 서울 큰 외삼촌댁에서 하숙한다는 소릴 듣고.... 일부러 그 근처에 세를 얻어 살았어. 그땐 은행으로 송금하는 것이 없던 시절이라 한 달에 한번 하숙비를 주러 어머니가 직접 오셨지. 하숙하는 4년 동안.... 매달 올라오셨는데 우리 집에는 한 번도 들르지 않을뿐더러... 내가 가도 아는 체도 않더라. 그때 조금만이라도 날 챙겼으면 내가 이렇게 한이 맺히진 않았을 거야. 처음엔 그리워했다가..... 미워했다가..... 나중에는 미친 듯이 엄마를 증오했지. 요양원에 찾아갔을 때도 엄마는 끝내 나를 인정하지 않았어.”
어머니의 딸이라는 여자가 말했다. 서러움이 북받치는지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그때 아무 말 안하고 있던 막내 영호가 큰 소리로 말했다.
“ 마저. 이 분 어디서 많이 봤다 했어. 외삼촌댁에서 하숙할 때 어머니가 오시는 날이면 서둘러 집에 왔지. 그때 대문 밖에서 서성거리던 사람이었어. 마저. 어쩐지 낯이 익다 했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큰 시누님이 손주 결혼식 날 아침에 운명하셨다는 소릴 들으니 그럴 리는 없지만..... 조카님의 한이 그렇데 내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더라고요.”
막내외숙모가 말했다.
“그때는 정말 엄마를 저주하며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고 싶었어. 생각해 봐라. 낳아 준 엄마가 엄마란 걸 거부하니 한이 안 맺히겠니? 내가 무슨 죄야. 난...말이야....엄마 딸로 태어난 죄밖에 없어.”
여자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다.
“누님이 인정 해 주지 않았으니 너희들이라도 인정해 주거라. 어머니 가시고 허전한데 어머니를 닮은 누나가 나타났으니 좀 좋으냐. 물론 혼란스럽기야 하겠지.”
외삼촌이 우는 여자를 보며 말했다. 막내외삼촌은 우리 사남매가 감당하기 힘든 일을 이웃 사람 얘기를 하듯이 어렵지 않게 말했다.
어머니 딸이라는 여자가 나타나니 별안간 어머니가 불결하게 느껴졌다. 내가 가게에서 여자 손님들과 웃으며 말이라도 할라치면 아내보다 어머니가 민감하게 굴었다. 나는 결벽에 가까운 그런 어머니가 무서웠다. 어머니는 늘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이니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숨겨놓은 딸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외삼촌 말을 들으며 어쩜 세상살이가 단순하고 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장례식장 직원이 와서 상주들은 상주 실에 들어가 주무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불을 몇 채나 빌리겠냐고 물었다.
“팔심하고도 일곱 해를 넘겨 사셨으니 호상이야. 그만 울어라. 어떻게 할 거냐. 상주들은 상주 실에 들어 가 자고 조카와 영미와 조카 댁들은 다 집에 들어가서 자고 와.
새벽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건 긴 장례야. 너희들도 나이가 있으니 몸 생각해야 해. 큰조카 댁도 결혼식 치르느라고 힘들었을 테니 얼른 들어가서 자.”
외삼촌이 제법 어른스럽게 상주들을 챙기며 말했다.
“외삼촌 난 집도 멀고 하니 여기서 잘께.”
여자가 말했다.
“조카. 너도 칠십이 낼 모레니 몸조심 해.”
쌍둥이처럼 자랐다는 막내외삼촌과 여자는 스스럼없이 서로를 챙기는 모습이 다정해 보였다.
“오늘이 어머니와 함께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야. 난 엄마 앞에서 잘 거야. 외삼촌이나 집에 가서 자고 와.”
여자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막내외삼촌은 직원에게 이불 네 채를 주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미는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었던 사람처럼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영길이 댁도 영호 댁도 영미와 외삼촌 부부를 따라 나섰다. 여자가 잔다는 것을 보며 이불 한 채 더 달라고 하여 잘까 하고 아내가 물었다. 나는 그러지 말고 결혼식 준비하느라 애 썼으니 조금이라도 편히 쉬라고 아내를 외삼촌과 함께 보냈다.
병원 직원이 이불을 가지고 왔다. 여자는 그 중 한 채를 챙겼다. 나는 껄끄러운 여자가 상제 실에서 함께 자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쳐다보았다. 다행이 여자는 직원이 건넨 이불을 안고 손님 접견실을 지나 분향소로 들어갔다. 나는 상주 실로 들어가며 어머니 영정 앞에 자리를 깔고 누운 여자를 보았다.
이불을 깔고 누웠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영길이와 영호는 금방 잠이 들었다. 쌕쌕 코까지 골았다.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고 뜻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살았던 두 동생의 얼굴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평화로웠다.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던 나는 깜빡 하고 잠이 들었다.
요의를 느꼈다. 주춤거리고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온 나는 무심코 상주 실 문을 열고 분향소로 나갔다. 국화꽃 향기가 코를 확 찔렀다. 꽃으로 치장된 상청에서 검은 띠를 두른 어머니가 웃고 있었다. 앞니가 약간 뻐드러진 것이 인자해 보였다. 어머니는 세상 모든 풍파를 비켜간 듯 해맑게 웃고 있었다.
저 사진은 아들 대학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이다. 어머니는 손주 졸업식 날 고등학교를 중퇴한 당신 아들에 대한 한이 풀린 듯이 좋아하셨다. 어머니 인생의 정점이 어쩜 저 순간이지 않았나 싶었다. 너무 늙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렇게 젊지도 않아 어머니가 영정사진으로 쓰면 좋겠다고 했던 사진이다.
무심코 빈소 귀퉁이로 눈길을 돌린 나는 하마터면 기절하며 소리칠 뻔 했다. 너무 늙지도 않고 그렇게 젊지도 않은 어머니가 영정 속에서 튀어나와 누워있었다. 어머니의 잠버릇은 모로 누워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자는 것이었다.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웅크린 어머니가 몸을 뒤척거렸다.
가슴에 칼을 맞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저렇게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를 붙들고 울자 어머니는 눈을 떠 쳐다보고 이건 무덤 속까지 가져갈 너와 나만의 비밀이야 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었다. 머릿속에는 오늘 하루의 기억이 하얀 도화지처럼 지워졌고 그 위로 칼 맞은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나는 그 일이 있은 후로 어머니와 나만 아는 비밀이 타인에게 알려질까 봐 조바심을 하며 살았다. 어머니는 한 번도 그 일을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와 둘이 되었을 때 그 일을 꺼낼까봐 두려웠고, 어머니와 나는 서로 서먹한 채 비밀을 가슴 속에 묻고 살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듣는 순간 그 비밀이 영구히 묻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자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여자의 모습을 보자 그때서야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봇물 터지듯 한번 터져 나온 울음은 아무리 멈추려 해도 멈추어지질 않았다. 꺼이꺼이 목구멍에서 삐져나오는 울음소리는 정적에 잠긴 빈소를 흔들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 세상에 나와 내가 스스로 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모두 다 어머니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물려준 가게를 아내가 운영하며 평생 먹고 살았다. 아내도 내가 고른 것이 아니고 어머니가 골라 짝지어주었다. 막상 어머니가 가셨다는 생각을 하자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두려웠다. 나는 점점 더 서러워졌다. 내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여자가 눈을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나 영정 앞에 앉아 울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가만히 손을 들어 흔들리는 내 등을 어루만졌다. 여자의 손끝이 마치 어머니의 그것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더욱 더 소리 내어 울었다.
어느 새 창밖으로 날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고달팠던 긴 하루가 가고 또 다른 하루가 울음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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