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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농사 일기

조선오이 2006. 6. 23. 21:10

새벽에 잠이 깨었습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랬습니다.
새벽이면 목청껏 울어대는 수탉 소리와
한꺼번에 울어대는 새소리들에 익숙하지 않아서입니다.
자동차 소리에는 무디었는데 자연의 소리에는 예민합니다.
아직 자연과 친해지지 않아서입니다.
저는 지금 자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꿈이 아닌가 합니다.
중학교 졸업후 도시로 흘러들어온 이후 주욱
저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살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정말로 꿈처럼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자곡동. 날이 밝으면 해의 붉은 볕을 제일 먼저 받는다는 데서 명칭이 연유한다고 합니다.
마당에서 남한산성으로 해뜨고 달이 뜨는 것이 보입니다.
사월 중순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날 이사짐을 정리하다가 이웃집으로 갔습니다.
"이 공터를 갈아 밭으로 만들면 안될까요?"
씨뿌리는 것은 때가 있어 늦으면 안되기에 마음이 급했습니다.
"힘이 들텐데요."
나와 동갑인 그집 안주인이 걱정하며 말했습니다.
괜찮았습니다. 아버지와 농사 지을 때 400평이나 되는 밭을 삽으로 갈았던 적이 있지요.
그러나 손바닥만한 땅이지만 일군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애써 밭을 파서 고르고 이랑을 만들었습니다.
남들이 보면 아주 우습겠지만 우리의 눈에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딸은 그곳에 꽃을 심으면 어떻겠냐고 말했습니다.
4월은 어디든지 꽃이 만발해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나이가 들어 그런지 화려한 꽃보다 열매를 달고 서 있는 가지나 고추가 더 어여뻐 보입니다.
고추와 토마토 가지 콩 상추 고구마 호박......내가 심은 것들입니다.
어느 것은 씨를 뿌리고 어느 것은 모종을 사다가 심었습니다.
조그만 밭에 너무 많은 종류를 심어 옹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침 저녁 물을 주어도 맨날 그 타령인 것 같더니 비가 오고 나면 쑤욱 자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잡초들은 더욱 더 열심히 컸습니다.
호미를 가져다 잡초를 뽑아 주었습니다.
밭에서 자라고 있는 이것들은 내 손길을 기다리는 자식 같기도 하고
나에게 자연의 오묘함을 가르쳐 주는 스승 같기로 하고
나의 여가를 함께 해 주는 동무 같기도 하였습니다.

며칠 전부터 상추와 치거리와 케일을 따다가 먹습니다.
값으로 치면 얼마 되지 않지만 내 손으로 가꾼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 속에 감동이 입니다.

이제 내 아이들은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만 가끔 나를 찾습니다.
관심을 갖고 말하면 잔소리라고 싫어합니다.
저러다가 어느 날 훌쩍 떠나겠지요.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가 결혼한 후 엄마의 허전함을 달래주었던 것이 저것들이라는 걸요.
세상은 아주 빠르게 변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비가 옵니다,
야외에 나갈 일이 아니면 무심했던 일기예보를 꼭 챙겨 봅니다.
한 뺌쯤 되는 밭을 일구고 부터 생긴 버릇입니다.
가만히 귀 기울으면 밭에서 비를 흠씬 맞은 생명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이 비 그치고 나가보면 생명들이 끌어올린 그 흔적을 볼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