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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희의 <노을의 기억>을 읽고

조선오이 2025. 4. 14. 21:04

강명희 소설집 <노을의 기억>을 읽다 - 고경숙

강명희 작가의 다섯 번째 소설집 <노을의 기억>을 반갑게 읽었다.

이 작가의 소설엔 늘 삶으로 충만한 땀 냄새가 있다. 한세상 살며 아등바등하다가 저도 모르게 대열을 이탈해 버린 슬픈 군상들이 넘나든다. 그 모든 세태를 감싸 안는 여운 짙은 서사도 매력적이다. 요즘 예술작품에 유행처럼 번지는 환상, 가상, 공상에 동원되는 아리송한 은유와는 거리가 멀다. 가공미인이 판치는 바람에 점점 자연미인이 드물어진 세상이지만 문학에서만은 흙냄새 나는 이런 소설들이 간절해지는데, 이번에도 기대를 빗나가지 않았다.

이 작품집에서 개작을 시도한 <노을의 기억>은 200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강 작가가 지닌 문학의식의 뿌리를 보여준 대목이라 관심을 끈다. 작가의 젊은 시절 제주도 거주 체험을 살린 절묘한 자연묘사와 함께 77년 전 4.3사건의 아비규환에서 혈육과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은 사람들을 곡진하게 그려냈다. 같은 소재를 시적 메타포로 새겨낸 한강의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2021)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시점이라 깨알 같은 디테일로 산문적 완결성을 갖춘 이 작품이 유난히 돋보인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비극을 한데 엮은 구성도 독특하다. 제주도민의 역사적 수난에 투시경을 댄 가슴 뭉클한 작품들의 숫자도 늘었고 그 접근법도 제각기 다른데, 이만한 취재력과 서사력이라면 아예 장편 완주를 욕심냈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파리 특파원이 된 남편을 따라갔다가 셋째 아이를 낳아놓고 세 번째 육아휴직을 못내고 혼자 귀국한 딸 대신 홀로 세 아이와 육아전쟁을 치를 사위를 도우러 파리로 간 <질경이>의 70대 장모. 젊은 날 빈한한 농촌살이를 피해 멀리 파독광부로 날아와 거듭 결혼에 쓴맛을 보다가 세 번째 아내를 찌르고 늘 가라오케에서 읊던 <꿈속의 고향>을 뇌이며 제 목숨을 끊는 <꿈속의 고향>의 80대 사내. 속칭 ‘빌라 왕’에게 화곡동 반지하 전세금을 뜯기고 한평생 살아간다는 일이 왜 이리 힘드냐고 유서를 써놓고 일가족 집단자살을 택한 <슈퍼문이 뜬 밤에 서래섬을 돌다>의 세차 여자. 한 달 내내 새벽 4시부터 해드랜턴을 쓰고 차를 닦아도 아파트 주민의 여섯 살짜리 한 달 영어유치원비만큼도 못 번다고 한탄하던 그녀다. 초고층 아파트 그늘에서 먹이사슬에 엮어 살아가는 천태만상을 조곤조곤 담아낸 수작이다. <아내가 돌아왔다>의 주인공 남편처럼 닭장을 탈출한 오골계 소식에 집나갔던 아내가 돌아오는 흐뭇한 회생담도 끼어 있어 읽는 맛을 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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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가 40대 후반에 만난 김승옥 소설가와의 짧은 인연을 불러낸 책말미의 회고담도 인상적이다. 강 작가의 신춘문예 당선을 그토록 칭찬하며 기뻐하던 스승이 그 두 달 후 뇌졸증으로 쓰러져 실어증인 채 수십 년 힘든 노년을 보내고 있다는 사연이 마음 아프다. 다행히 1960년대 문학계를 제압하던 그 문학 스승의 감수성은 녹슬지 않아 그림으로나마 이심전심 마음을 나눈다니 천만다행이다. 그분이 그 옛날 당부했듯이 강 작가가 무엇에도 구애받지 말고 맘 놓고 상상하고 구상한 이야기의 봇물을 계속 소설집으로 쏟아내는 대작가로서의 노년을 맞기를 간절히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