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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국수>< 분천 ><어린 농부> 독서토론회

조선오이 2023. 3. 3. 06:51

인일여고 한 학년 후배들은 언제부터인지 매달 책 한 권을 읽고 듀오(줌 기능)에서 모여 독서토론을 한다.
지난 번 <65세>에 이어  이번에 <잔치국수><분천><어린농부>를 읽고 독서토론을 했다. 토론 후 이를 정리해 올리는데 그 글이 얼마나  세세한지 꼭 토론에 참석한 듯 하다. 여고 홈페이지에 올려온 글을 옮겨본다.

(강명희 작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자신이 만났거나 전해 들은 사람들의 사연들을 가지고 어쩌면 이렇게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맛갈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2월에 읽은 강명희 작가의 <잔치국수, 분천, 어린 농부>는 책을 손에 쥐면, 그 재미에 빠져 단숨에 읽게 되는 책이다.
세 편의 중편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가 여성들이다.
친구들은 삶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여성들의 모습에 자신을 대비하거나 어머니의 삶을 떠올렸으며, 주변의 누군가를 기억하기도 하였다.
한 친구가 말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다른 어떤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다.
어린 농부 말미에 나오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했던 말에 공감한다.
‘에미야, 한 남정네의 아낙으로 절개를 지키다 죽는 것도 중요하다만, 가문을 새로 일으키기 위해 절개를 버릴 수도 있어야 하는겨. 여자는 말이여, 이 씨감자 같은 거여. 자식이 제 역할을 할 때까지 제 살을 베어 먹여 살리는 씨감자 같은 거여.’
(감자는 씨감자에서 양분을 취하며 자란다.
그러다가 뿌리를 내려 스스로 양분을 흡수할 때서야 비로소 어미에게서 독립한다.)
어린 농부에 나오는 화도댁처럼 소처럼 일하며 농사를 지으셨던 엄마,
가난한 살림에 그 많은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억척스럽게 일하던 엄마,
동생들 학비를 대기 위해 서독 간호사로 자원하여 떠났던 친구 언니,
집 안을 돕기 위해 역시 간호사로 서독에 파견 갔던 큰 시누이는
씨감자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일까?
삶이란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루어졌음에 감사한다.
작품들의 공간적 배경인 강화와 김포, 일산 등이 친숙한 곳이라 더 친근하고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친구도 있었다.
강화의 바닷가를 묘사한 대목은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듯 소리와 빛깔이 느껴졌다.
만월이 바다 한가운데서 금빛으로 빛나던 밤,
달맞이꽃이 핀 언덕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는 젊은 부부의 모습,
바다가 열꽃 앓는 사람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갯벌에서 조개를 캐는 일가족, 여남은 계집아이들이 황혼 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
우두커니 서서 석양을 바라보는 우수에 찬 화도댁.
(서해의 노을이 얼마나 붉고 진한지 학교 옥상에서 바라보던 풍경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친구는 지금은 잘 쓰지 않는 화석화된 언어를 사용한 부분을 언급하기도 했다.
‘화도댁이 탕개를 들고 장독으로 갔다.’는 표현에서, 탕개란 말이 반가웠다.
잊혀진 단어를 되살리는 역할도 소설의 한 기능 아닐까?
책 말미에 실린 작가 동생의 후기가 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친구는 말했다.
<어린 농부>는 작가 집안의 실제 있었던 일로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고 쓰여지지 않으면 묻혀버릴 개별적인 한 가족사지만, 이런 개별적인 삶들이 모여 역사가 된다는 동생의 말이 공감된다.
친구 주변에도 남다른 인생을 살아온 분이 계신데, 누군가 기록해주면 그분의 삶도 역사가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된다는 점에서 그냥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어린 농부>가 인상적이었지만, 두 번째 읽으니 <분천>이 더 마음에 와 닿더라는 친구들이 많았다.
<분천>의 거듭되는 우연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었다.
한 친구가 아는 사람도 자식을 잃고 부부가 더 이상 함께 살지 못하고 이혼한 경우가 있었단다.
또 다른 친구가 아는 이도 남편이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가 나이 들어 병든 모습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아내는 받아주고 싶어 했지만, 자식들의 반대로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딸을 잃고 남편마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자식과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고 시어머니의 온갖 폭언과 악담을 견디며 수차례 자살을 시도하던 여재댁이 다시 살아 보기로 마음을 돌려 먹은 것은 자신의 슬픔에만 갇혀 있던 시선이 시부모의 아픔과 슬픔을 보기 시작하면서 였다.
슬픔은 또 다른 슬픔을 가진 사람만이 위안이 된다지만 어떤 슬픔은 서로를 밀어내기도 한다.
한 친구는 세 편의 소설이 진실로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이 참 좋았다.
여재와 여재댁, 여재와 윤희, 분자와 애희가 서로의 상처를 풀어내고 용서하는 모습을 보며 위로를 받고 부러움을 느꼈다.
우리들에게 그런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마음에 찌꺼기 없이, 더 이상 감정의 부채를 남기지 않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는 선택을 우리가 할 수 있기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살아가는 힘을 어디에서 얻는가?
이처럼 좋은 작품은 널리 소개되고 많이 읽혀져야 한다.
강명희 작가님의 <히말라야 바위취> <서른 개의 노을> <65세>도 좋았지만 <잔치국수, 분천, 어린 농부>는 단연 최고라 생각하며, 점점 더 단단해지는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