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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습작시절 이야기

조선오이 2022. 10. 2. 06:46

나의 습작시절 이야기

나는 내 딸을 키울 때 한 시간도 남의 손에 맡겨 보질 않았다. 그러니 아이들 자랄 때 뭘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큰 아이 6학년 때 제주에서 살다가 서울로 왔다. 애들 교육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은 내가 공부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당시 한창 인기 좋은 <전원일기>같은 드라마가 쓰고 싶었다.

서울에 오자마자 근처 문화센터에 등록했다. 공부를 하는데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이들 학교에 가면 싱크대에 설거지를 쌓아놓고 아이들이 올 때까지 밥도 안 먹고 글을 썼다. 일주일에 작품이 두 편씩 나왔다.
첫 작품은 <여명과 노을>인데 떠오르는 여명 같은 남자와 사위는 노을 같은 두 남자의 이야기다. 그것을 동아일보에 냈더니 당시 인기있던 삼국지 시나리오를 쓰셨던 유현종 작가가 나를 불렀다.
“참 좋은 작품이다. 소재도 내용도 다 좋다. 하지만 상대방이 너무 완벽했다.” 며 아쉬워하셨다. 그러면서 이 작품을 보면 이 사람은 소설을 쓸 사람이다. 하고 단정을 하셨다. 당시는 드라마가 더 매력적이라 어떤 위안부 아들의 심리를 그린 드라마(제목은 생각나지 않음)를 <여명과 노을>과 함께 이름을 각각 달리해 문화일보에 냈다. 심사위원이 또 나를 불렀다.

“두 작품 다 최종심에 올라왔어요.”
“전 이름을 다르게 썼는데요.”
“다른 이름으로 냈어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다른 작품을 뽑았어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제자였어요.”


이듬해 <노을>이란 제주도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써서 동아일보에 또 응모했다. 거기서도 최종심에 가서 떨어졌다.


친구들 몇몇이 모여 드라마 스터디를 했다. <수상한 그녀>를 쓴 시나리오 작가 홍윤정 선생님과 지금까지 함께 공부하는 남미자샘과 또 다른 멤버들도 있었다. 그때 공부하던 멤버는 크든 작든 작품들이 다 드라마가 되었다. 나는 kbs sbs 최종심에만 몇 번 올라갔지 드라마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소설과 함께 공부했다.

소설을 써서 여기저기 응모했다. 그러나 역시 또 다 최종심이었다. 상금이 천만 원인 진주일보 공모에 응모했더니 심사하신 박태순 소설가는 소설 미학적으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데 작품 속에 자본주의가 미화된 것이 더럭 겁이 났다고 평했다. 내 작품을 보고 자본주의를 미화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한 불과 1, 2년 사이의 일이었다. 나는 드라마든 소설이든 뭔가 될 줄 알았다. 그때 신경숙은 한창 날리고 있었고 후배인 은희경과 전경린이 동아일보로 화려하게 등단했다.

어느 날 남편이 회사를 그만 두었다. 눈 앞이 노랬다. 하지만 뭔가를 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먹고 살아야겠기에 서점을 시작했다. 한창 문학에 열이 올라있는 나를 장사시킨 남편과는 그때부터 메울 수 없는 골이 지금도 남아 있다.

꿈도 희망도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절망적일 때는 서점 구석에 앉아 작품을 썼다. 어찌어찌 낸 작품이 한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다. 그때 또 나는  뭔가 될 것 같았다. 내 글을 만화가가 만화로 그려 동아일보에 보냈더니 연재해주었다. 제주 4.3 문학상에 중편 <그 여자의 제사>를 냈는데 당선작 없는 가작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가작은 받지 않겠다며 수상거부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바빠서 언제나 5% 부족한 작품을 써냈던 것 같다.

등단과 동시에 친정아버지가 아프셨다. 아버지는 1년 반 투병하다가 돌아가셨다. 병원으로 아버지 집으로 정신이 없었다. 인터넷이란 것이 생기자 서점은 사양사업이 되었다. 과감하게 서점을 정리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친정엄마가 고관절이 부러져 누워계시어 내 집으로 모셔왔다. 2년하고 5개월을 내집에서  모셨다. 더 모셔야 했는데 큰 손주가 태어나 요양원으로 모셨다.

그때부터 할미맘 육아가 시작되었다. 딸은 큰손주 낳고 육아휴직을 하고, 둘째를 임신한 상태로 복직을 하고, 둘째 낳고 육아휴직을 하고, 세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복직을 했다. 그렇게 셋째가 태어났다. 그러니 손주를 봐주고 안 봐주고도 왈가왈부할 틈도 없었다. 나의 할미맘 생활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와중에 딸이 육아휴직 끝나기 전에 여행을 다녀오라고 해 히말라야에 갔다. 그곳을 다녀와 첫 작품집 <히말라야바위취>를 냈다. 2년 후에 <서른 개의 노을>이 세상에 나왔다.
막내가 어린이 집 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도우미를 쓰기 시작했다. 도우미가 오면 근처 도서관에 가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품은 많이 쌓여갔다. 하지만 책으로 묶는다는 것이 의미 없는 일 같아 출간은 하지 않았다.
내 65세 끄트머리에 숙문회 선배교수님이 전화를 하시어 작품이 있다는데 왜 책을 내지 않느냐고 질책하셨다. 정신이 번뜻 들어 부랴부랴 책으로 묶은 것이 6년 만에 나온 <65세>였다.

작년 봄에 이곳 분천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사위가 가족을 데리고 프랑스로 떠났다. 나는 내 작품 <65세>에서 결심했던 것처럼 누구의 딸이 아닌, 누구의 부모도 아닌,  누구의 할머니도 아닌, 누구의 아내도 아닌 완전히 홀가분한 내가 되었다.


작년에 단편 <분천>을 썼다. 그리고 올해 그것을 중편 240매로 개작했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일은 애지중지하던 자식을 떠나보내는 일이다. <분천>은 40년이 지나도록 죽은 아이 이름으로 불리는 늙은 부부 이야기다.
10월 7일 내 중편집 <잔치국수>< 분천><어린 농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