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의 표제 작 <서른 개의 노을>은 드라마 피디와 드라마 작가와의 사랑 이야기다. 나는 피디선생님께 드라마 공부를 했었다. 실제로 그때 동화를 쓰는 나의 대학 후배 Y와 피디선생님은 열애에 빠졌다. Y는 선생님께 전화가 오거나 썸씽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말하곤 했다. 나는 기꺼이 들어주고 상담을 해 주었지만 Y가 주책스럽게 느껴졌다. Y는 정신없이 선생님께 빠져들었고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불안하기만 했다. 그것은 Y가 외국으로 가면서 막을 내렸다.
소설공부를 할 때 나는 제일 먼저 그것을 모티브로 소설을 썼다. 작가와 피디와의 사랑을 작품으로 얽어보고자 하는 의도였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작가와 연출가로서 작품을 매개체로 완성된 사랑을 그리고자 했다. <서른 개의 노을>은 그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작품 속에 내 고향 벌판 이야기를 넣고 비록 꾸며진 이야기지만 할아버지의 에피소드를 넣으니 누가 보더라도 내 얘기 같았다. 써 놓고 보니 쑥스러웠다. 이 작품은 대학 문인들이 2년에 한 번 발간하는 작품집 속에 발표를 했다.
어제 남편과 함께 거제도로 여행을 가는데 띠릭 하고 문자가 왔다. 혹시 함께 공부하던 선배 아무개냐고 묻는 것이다. 누구냐고 문자로 물었더니 Y라고 했다. 외국에 6년 있다 들어와 지금은 다시 동화를 쓰며 며칠 전 동문회에 나가 학교 문인들이 낸 문학지를 받았는데 그 안에서 내 이름과 내 전화 번호를 알았다는 것이다. 거의 이십년 전에 함께 공부하던 내 작품 <서른 개의 노을>속의 실제 인물 Y와 그렇게 연락이 되었다.
작품집 마지막 교정을 볼 때 나는 잠을 설칠 정도로 불안했다. 내 작품집 속의 인물들이 다 들고 일어나 자기 얘기 아니냐고 대들 것 같았다. 그래서 작가의 말에 변명 비슷하게 말했다.
"소설은 픽션이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소재는 주변에서 얻어왔지만 작가가 상상하여 이야기로 재구성한 픽션이다. 혹 주변인의 모습이 보이더라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래도 불안했다. 그래서 친구에게 네 얘기를 썼는데 빼라면 빼겠다 하고 문자를 보냈더니 '나는 네 작품에 개인사를 빼라 넣어라는 못한다. 네 소신껏 해라' 하고 쿨 하게 답장을 보내주었다. 책이 나왔을 때 그 친구에게 책을 주지 못했다. 친구는 다른 곳에서 책을 구입해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책 10부를 주문하면서 내게 면죄부를 주었다.
사위는 자신의 블로그에 '가장 수준 낮은 독자는 소설 내용을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연관시켜 읽는 그래서 작가와 대화를 할 때 거기 나온 누구는 실제로 누굴 생각하고 쓴 거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상황이 워낙에 비슷해 삼류독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소설이건 드라마건 100% 창작은 없다. 아니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다 비슷비슷하다. 거기서 이야기를 만드려니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1차적인 독자는 너그럽게 이해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