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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이야기

조선오이 2020. 8. 9. 18:02

농사이야기

 

어릴 때 우리 집은 밭 한가운데 있었다. 집이 밭이고 밭이 집이다. 큰 집 작은 집이 오 분 거리에 있어 일이 있으면 다 모여 밭두렁에서 놀았다. 일이 곧 유희였다.

강화에서 태어나신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어릴 때 배 타고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 후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강화에서 김포로 할아버지를 데리고 재가하셨다. 할아버지는 소위 말하는 데리고 들어간 자식이었다.

할아버지는 의붓자식이 낯선 땅에서 뿌리내리고 살려고 몸부림치던 처절한 이야기를 가끔 공부하는 내 곁에 앉아 이야기 해 주셨다. 가뭄 속에도 할아버지 물을 퍼 날라 논에는 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나는 그 얘기를 써 보려고 소설가가 되었는데 아직까지 쓰지 못하고 있다.

하지 볕보다도 더 부지런하셨던 할아버지는 62녀를 두셨는데 온 가족이 합심해서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셨다. 당시는 소출의 반을 지주에게 주는 병작제도였다. 할아버지는 농사를 잘 지어 언제나 가장 많은 벼를 지주에게 바쳤다고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지주에게 이쁨을 받고 많은 땅을 받아 농사지을 수 있었다.

해방 후 농지개혁이 있었다. 농사짓던 땅을 오년동안 정한 만큼의 땅 대금을 갚으면 자기 땅이 되는 제도였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지주가 되었다. 처음 할아버지 땅을 장만 했을 때의 그 기분 이제 어느 정도 상상할 수가 있다.

할아버지는 땅이 제일 귀하다고 자식들 공부도 가르치지 않으려고 하셨다. 공부하다 들키면 책이 아궁이로 들어갔다. 그래도 자식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몰래몰래 공부를 해서 아버지는 서울대를, 삼촌 둘은 고대를, 중대를 교대를 들어갔다. 땅에 대한 할아버지 열정 못지않은 공부에 대한 열정이다. 나는 우리 집안이 절대 머리 좋은 집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대신 삶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보다도 뜨겁다.

아버지는 은퇴하시고 농사를 지으셨다. 우린 아버지한테 다니며 농사를 거들어드렸다. 아버지가 가신 지금 나를 포함한 딸 셋은 다 아버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보는 것이 무섭다고 손주들이 농사에 관심이 대단하다. 아파트 옆에 내버려두었던 공터를 밭으로 일구고 학교에서 배운 대로 과일 먹다가 나온 씨를 싹을 틔워 모종을 낸다. 참외 씨에서 싹이 나면 거기서 싹이 나서 자라는 것이 어린 아이의 눈으로 얼마나 신기한지. 손주 만나면 반은 농사이야기다. 전화 내용도 반이 농사 이야기다.

나 역시 일상사에서 반은 농사이야기다. 다음 블로그 이름도 <농사일기>고 페이스 북에서도 반은 농사이야기다. 내 소설 역시 반은 농사 이야기고. 페이스 북 친구들도 전국 각지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분들이 많다. 내가 특별히 농사에 집착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나는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고 있다고 누누이 말했다. 이번에 10년을 남의 땅에서 농사짓다가 땅을 장만했다니 모두들 제일처럼 기뻐해준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고 하는데 내가 잘못 살지는 않았나 보다.

무지막지하게 비가 오는 날, 할아버지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내 농사에 대한 뿌리를 정리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