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삼둥이 할미맘
우리 동네에서 나는 좀 유명하다. 모르는 아이들이 지나가다가 인사를 하고, 엄마들도 심지어는 할아버지까지 인사를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할머니가 유명인사가 된 것은 우리 세 손주들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아이 셋을 봐 주는 할머니는 천연기념물적인 존재란다. 천연기념물이 되었지만 나는 딸의 아이 셋을 봐 주고 있다.
딸애가 결혼하고 3년이 되도록 아기를 갖지 않았다. 갖지 않는 것이냐 못 갖는 것이냐 물으면, 회사 다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아이를 갖느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내가 키워 주겠다고 멋모르고 덜컥 약속을 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딸은 임신을 했다.
예쁜 울음소리를 터트리며 첫아이가 태어났다. 세상에나! 갓 태어난 아이가 이렇게 예쁘다니! 내 아이들 때는 못 느끼던 기쁨이며 환희였다. 아이가 태어나니 조용하던 집안이 시끌시끌하고 날마다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아이와 산모가 가져온 노동은 한이 없었다. 육아휴직을 한 딸과 종일 종종거리며 아이를 봤다. 이렇게 힘든데 내 아이는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시간은 지나고 아이는 자라 두 살이 되어 갈 때였다.
지인이 아이는 키울 때 함께 키워야 하니 얼른 딸에게 둘째를 갖으라고 충고를 해 주었다. 내가 딸에게 그 말을 고스라니 전했다. 이번에도 딸은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둘째를 임신했다. 육아휴직 기간이 끝나 회사에 출근할 때는 이미 배가 불러있었다. 둘째를 키워야 한다는 사실이 겁이 났다. 하지만 이렇게 예쁜 자식인데 둘은 있어야지. 좀 크면 자기들끼리 놀아서 어쩜 더 편할지도 몰라. 스스로 위로를 했다.
둘째가 태어났다. 하나만 있을 때보다 두 배로 정신이 없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내가 애들 키울 때와는 세상이 달라져 쓸데없는 것들을 중요시 하고, 정작 쓸데 있는 것들은 도외시 하는 육아 방법으로 딸과 계속 갈등했다. 좋아하던 등산은 아예 못 갔다. 내가 왜 누굴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회의도 들었다. 그래도 시간은 지나갔다. 둘째가 돌이 지나자 육아가 조금씩 수월해지기 시작했다. 휴직을 했던 딸이 복직할 날이 다가오자 여행이라도 갔다가 오라고 말했다. 육아가 조금 쉬워졌으니 혼자서도 두 아이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육십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나는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떠난 히말라야 트레킹이었다. 세계에 8000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15개가 있는데 그 중 8개가 네팔에 있다. 네팔 여행은 설산을 바라보며 트레킹 하는 것이 묘미다. 설산이 잘 보이는 곳에는 예외 없이 롯지가 있다. 그곳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에 설산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밀크티를 마시는 낭만도 특별하다. 열대 우림지역으로부터 눈 내리는 고산지역까지 몇 일만에 다 맛볼 수 있는 것도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기어 다니던 둘째가 보름 사이에 ‘이주일’처럼 손을 휘저으며 걷고 있었다. 엄마의 도움 없이 혼자 두 아이를 돌보던 딸의 살림 솜씨도 많이 늘어 이래저래 흐뭇한 여행이었다. 점점 편해지는 육아에 대해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내가 너무 자랑질을 많이 했나 보다. 딸이 셋째 임신 소식을 전했다. 내가 히말라야 산 속을 헤매고 있을 때 딸은 셋째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때 그 심정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또 다시 힘들고 정신없는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말이 안 나오고 잠도 안 왔다. 우울이 익숙한 손님처럼 자주 찾아왔다. 다시 히말라야 산 속으로 들어가 이 힘들고 복잡한 세상에 나오고 싶지 않았다. 셋째를 기쁨으로 맞이하기는 정말로 쉽지 않았다. 덕분에 딸과의 관계가 내내 소원했다.
다섯 살짜리 손녀와, 아직 기저귀를 떼지 못한 세 살짜리 손자가 어린이집에 입학하는 날, 셋째가 우렁찬 탄성을 내지르며 이 세상에 나왔다. 한 생명의 탄생은 여전히 신비롭고 아름답고 벅차다. 첫째 낳았을 때보다 그 기쁨이 익숙하다는 것 뿐, 첫째 때 못지않게 기쁘다. 갓난 아이 울음소리가 육아의 근심을 싹 덜어주었다. 두 아이도 키웠는데 세 아이라고 못할까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쩌다 보니 딸은 셋째를 생산해 내고, 나 역시 어쩌다 보니 세 아이를 키우는 할미맘이 되었다. 딸 이름 앞에는 다산이란 호가 붙었다. 주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애국자라고 말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세월은 흘렀고, 아이들은 자랐다. 지금 큰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둘째가 1학년, 그리고 6살인 막내가 어린이집을 다닌다.
“할머니.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는 할머니가 엄마를 예뻐했는데 우리가 태어나니 이젠 엄마는 안 예쁘고 우리만 예쁘지요?”
“그걸 어떻게 알아?”
“말 안 해도 그쯤은 알 수 있어요.”
오늘 아침에 어린이 집 데려다 주러 갈 때 막내가 의젓하게 말했다.
누가 나에게 육십여 평생을 살며 가장 기쁘고 보람 있었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세 아이를 돌봐준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할 일 없어진 노후에 방황하지 않았던 것도 세 손주들 덕분이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것도, 늘 여기저기 아프던 것도 손주들 보고부터 신기하게 싹없어졌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손주들 덕분이다. 오히려 요즘은 내가 손주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이 유투브 속의 아이들이 내가 케어하고 있는 손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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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0cOfvwY8R6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