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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탕에서 너를 보내다 (한국문학인 여름호)

조선오이 2019. 6. 20. 21:55

 

랑탕에서 너를 보내다

 

강명희

 

 

 

로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렸다. 산간지역의 어둠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땀으로 젖은 몸에서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졌다. 배당된 숙소에 들어가니 깜깜했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포터가 촛불을 가져왔다. 촛불이 흔들리자 붉은 나비가 날아가는 것처럼 벽이 너울거렸다. 촛불을 비춰 배낭 속에서 헤드랜턴을 꺼내 두르고 부엌을 찾아갔다. 일행이 하나하나 들어왔다. 천장에 달걀만한 전등 하나가 가물거리고 있었다.

 

고수 냄새가 강한 달밧이 입에 맞지 않아 저녁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숙소로 들어왔다. 숙소에는 한 사람이 겨우 누울 만한 크기의 엉성한 나무 침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침낭을 펴고 그 속에 들어가 누워 지퍼를 올렸다. 새벽에 길을 나서서 계곡 사이에 난 좁은 돌길을 오르내리며 걸었다. 종일 귀를 때리는 요란한 물소리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피곤이 몰려왔지만 물소리 탓에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깜빡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요의를 느꼈다.

 

낯선 숙소의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추웠던 몸이 땀이 말라서인지 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암흑천지였던 사방이 희뿌옇다. 웬일인가 싶어 둘러보았다. 눈앞에 산이 가두어 놓은 것 같은 뿌연 공간이 보였다. 보자기 몇 개 펼쳐놓은 것 같은 조붓한 공간, 그것은 바로 하늘이었다. 높은 산 사이에 만들어진 계곡은 하늘조차 동굴 속에 가두어 놨다. 좁은 하늘에는 분도기모양의 반달이 떠서 달빛을 뿜어내고, 주위에는 무수히 많은 별이 꽃처럼 피었다. 하늘조차 산에 갇힌 곳-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히말라야 랑탕벨리다. 지금 여기는 첫 번째 로지다.

 

둘째 날 짐을 가지러 온 포터는 첫날 짐을 옮겨주던 열일곱 살 어린 포터가 아니었다. 짐의 무게가 제각각 다르니 포터들이 짐을 돌아가면서 공평하게 멘다고 했다. 오늘은 제법 나이가 들었을 법한 포터였다.

 

“나마스떼”

 

내가 먼저 포터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가무잡잡하고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가 방긋 웃으며 수줍게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까만 얼굴에 고르고 하얀 이가 드러났다. 이름을 물으니 만루라고 했다. 만루는 네팔 식 억양이 들어있기는 했지만 한국말을 한국사람 만큼 자유자제로 했다. 그는 한국에서 5년 간 체류하며 일했던 현지가이드 겸 포터였다. 한국에 또 안 나가냐고 물었다.

 

“한국사람 일 많이 많이 해요. 일하고 밥 먹고 일하고 밥 먹고 또 일하고....언제나 일 일 일.... 지금 생각하면 그 오 년을 어찌 견뎠나 생각 되요. 그땐 몰랐는데 돌아와 생각하니 더 이상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고국에서 한국어 현지가이드를 하고 있어요.”

 

언제부터인지 히말라야에는 한국 사람이 많이 왔다. 나는 로지 입구에 붙여놓은 메뉴판을 보고 그것을 실감했다. ‘신라면 팜니다.’ ‘가성비 최고애요’ ‘김치찌게 이써요.’ 그리고 곳곳에 이곳을 다녀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트래커가 돌이나 벽에 써 놓은 한국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계곡을 따라 난 트레킹 길은 몹시 험하고도 아름다웠다. 좁은 계곡은 돌로 된 가파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품었다. 길 사이사이 네팔의 국화 난리구라스가 피어있고 계곡 끝으로는 어디서나 백발이 성성한 산신령 같은 설산이 보였다. 거칠고 웅장하게 흐르는 계곡에는 때로는 천둥소리 같은, 때로는 거친 바람 같은 소리를 내며 빙하 녹은 물이 흘렀다.

 

돌무더기를 쌓아 놓은 탑 앞에 섰다.

 

“3년 전 지진이 났을 때 여기에서 이슬라엘 사람이 돌무더기에 깔려 죽었어요. 그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위령탑이어요.”

 

만루의 말에 일행은 탑 앞에 서서 묵념을 했다. 네팔은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고 고유의 숫자를 썼다. 상형문자 같은 글씨에는 희생된 사람의 이름과 날짜가 쓰여 있다. 만루가 숫자를 번역해 읽어주었다. 공교롭게도 3년 전 4월 25일 오늘이었다. 그는 바로 3년 전 오늘 나처럼 트레킹을 나섰다가 바로 이 자리에서 희생당한 사람이었다. 오늘이 지진 때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기일이었다.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보다 250배 더 큰 지진이 이곳에 있었다. 3년이 지났건만 아직까지 온전한 건물이 없고 산골짜기마다 돌무더기가 흘러내려 그날 지진의 참상을 보여주었다.

 

“지진이 난 후 문재인대통령이 대통령 출마하시기 전에 이 길을 걸으셨어요. 여기에 다녀가셔서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셨지요?”

 

다시 산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만루가 말했다. 히말라야 랑탕 트레킹 말이 나오자 인터넷 검색을 했다. 가장 먼저 뜬 기사가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출마 선언 전에 포터를 데리고 폐허가 된 학교와 마을을 찾아 지진 복구 활동을 했다는 기사였다.

 

“만루가 그때 따라갔던 포터야?”

 

“나 아니에요. 한국에 함께 나가서 일했던 친구에요. 가이드 겸 포터를 구한다고 해서 갔더니 그분이더래요. 그분이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 우린 한국에 있었거든요. 한국에서 매일 텔레비전에서 보던 분이 눈앞에 있어 깜짝 놀랐대요.”

 

대학동창 등산모임에서 트레킹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선뜻 가마하고 나서지 못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카트만두에서 트레킹 기점인 샤브르베시까지 버스로 가는 여덟 시간이 문제였다. 산허리에 길을 냈으니 거기까지 오르는 길은 구절양장처럼 구불거렸고 높은 산 중턱에 난 길은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했다. 외길에서 앞차가 고장이 나면 그 차를 수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고, 산사태가 난 길이 나오면 흙을 치워가면서 가는 사진까지 있었다. 그런데 문재인대통령이 출마하기 전에 랑탕 트레킹을 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것은 내게 그 길이 그렇게 위험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하고, 나는 선뜻 가마하고 따라나섰다.

 

막상 길을 달려 보니 블로그에서 읽고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길 사정이 좋지 않았다. 지진으로 무너진 돌무더기 길은 태반이 아직까지 복구하지 못했다. 전날 비가 많이 온 탓에 푹푹 빠지는 진흙탕 길도 많았고 어떤 곳은 돌들이 흘러내려 차가 길게 늘어서서 길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렸다. 가뜩이나 느린데 검문을 세 번이나 했다. 험하고 좁은, 길 같지 않은 길이라 차들이 교차할 때는 한쪽으로 차를 바짝 대고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바로 한쪽은 천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였다. 기사는 그런 길을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하며 곡예운전을 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카트만두에서 직선으로 55킬로의 거리에 있다는 트레킹 시점 샤브르베시까지 8시간을 걸려 도착했을 때,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여겨졌다.

 

“ 네팔 왕궁에 가보셨어요?”

 

“그럼 나도 네팔 사람처럼 궁중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걸.”

 

나는 스마트폰에서 사진을 꺼내 만루에게 보여주었다. 트래킹 시작 전에 들렀던 곳이다. 한창 지진 복구 작업 중이었다. 현장에 일본 국기가 걸렸다. 그것은 일본의 원조를 얻어 복구를 하고 있다는 표시라고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다.

 

“거긴 18세기의 파탄 왕조의 왕궁이고요. 얼마 전까지 왕이 살았고, 왕정이 끝난 지금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곳이요.”

 

“거긴 안 가봤어.”

 

“혹시 네팔에서 일어난 그 일 아세요?”

 

“그 일?”

 

“왕궁에서 왕 왕비 공주 등 왕족 8명이 사살된 일요.”

 

그 일이라면 너무 끔찍한 일이라 나도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떠들썩하게 새천년을 맞이한 이듬해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왕 왕비 공주 등 네팔 왕족이 궁중만찬도중 몽땅 사살 당했고 배후인물로 지목되던 죽은 국왕의 동생이 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보도로 기억한다. 새 왕조는 국내외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럴수록 왕은 철권통치를 했다. 아직도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존재할 뿐 아니라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린 참극이라 놀라웠던 기억이다. 내가 기억나는 대로 대강 얘기하자 만루가 말했다.

 

“네팔의 아픈 역사를 기억해 주는 외국인이 있군요. 고맙습니다. 왕세자가 결혼을 반대해 벌린 일이라고 발표했어요. 그걸 누가 믿어요.”

 

“ 권력의 세계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우리나라에서도 권력을 잡기 위해 수천 명씩 학살한 사람도 있어.”

 

나는 스물다섯 살 때 일어났던 끔찍했던 광주 민주화 항쟁을 떠올리며 말했다.

 

“우린 거리로 뛰어 나갔어요. 카트만두 거리는 사람의 물결로 가득 찼어요.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많은 사상자가 났어요. 그리고 언론을 무섭게 탄압했어요. 모두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말 한마디 못하고 있었죠.

 

이때 마오당의 반군지도자가 이번 사건에 정치적인 음모가 있으니 인민과 군인들은 합심해서 갸넨드라 국왕을 몰아내야한다는 칼럼을 썼어요. 용감한 분이어요. 저는 그 칼럼을 읽고 망설임 없이 마오당에 들어갔어요.”

 

“마오당은 중국공산당? 그럼 만루는 공산당이야?”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살인 왕정만 무너뜨린다면 어디에도 몸을 담고 싶었어요. 거기서 게릴라 활동을 하며 왕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항쟁 했어요”

 

“네팔도 민주화 항쟁의 역사가 치열한 나라네.”

 

“2006년 4월 왕정이 무너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20만 명이 카트만두 거리로 나가 가넨드라 국왕이 물러날 것을 외쳤죠. 그때 14명이 죽었어요. 그렇게 피를 흘리고서야 왕정이 무너졌어요. 오년 만이었어요. 우리는 그날의 항쟁을 ‘승리의 행진’이라고 불러요. 그날.....”

 

만루는 말을 잇지 못하고 걷다가 한참 만에 말을 이었다.

 

“함께 활동을 하던 친구가 거기서 죽었어요.”

 

만루는 친구 생각을 하는지 묵묵히 앞서 걸어 난리구라스가 핀 나무 사이를 걸어갔다. 길에는 핏빛 난리구라스 꽃송이가 목 잘린 것처럼 뚝뚝 떨어져 있었다.

 

“작년에 한국에서 일어난 촛불혁명을 봤어요. 우린 목숨을 걸고 5년 만에 해낸 일을 한국은 축제하듯이 불과 몇 개월 만에 해 냈잖아요. 우린 많은 사상자가 났는데 한국은 사상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면서요?”

 

잠시 후 만루가 붉은 날리구라스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 내게 주면서 말했다. 난리구라스는 수십 개의 작은 꽃이 모여 꽃송이를 이루었다. 봄이면 우리나라 전역에 지천으로 피는 진달래처럼 네팔 산천을 붉게 물들이지만 잡목이 아니고 키 크고 고목이 많아 꽃이 풍성하다.

 

만루의 스마트폰에는 한국의 네이버와 다음 포털사이트가 깔려 있어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실시간으로 보았다. 페이스 북에 한국 친구도 100명이 넘었다. 대규모 촛불집회에 대해서도 나만큼이나 자세히 알고 있었다. 박근혜대통령의 탄핵이 통과되고 문재인정권으로 바뀐 것을 마치 자기가 해 낸 듯이 기뻐했다.

 

“촛불집회 지지자....시죠? 아 아닌가?”

 

만루는 내게 실수라도 하지 않았나 싶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난 아무 데도 지지하지 않아.”

 

내가 냉정하게 말했다.

 

“하긴 나이 많은 분들은 태극기집회에 참석한다면서요?”

 

“난 태극기 집회 지지자도 아니라고.”

 

내가 소리쳤다.

 

“그럼 뭐에요?”

 

“정치에 관심이 없을 뿐이야.”

 

나는 만루의 말을 회피했다.

 

내가 중학교 때 삼선 개헌이 되고 고등학교 때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수업시간에 유신이 한국적민주주의라고 세뇌 당했다. 유신치하에서 대학생활을 했다. 캠퍼스 안에서 몇 명만이라도 모이면 교내에 상주하는 요원에게 보고 당하고 문제 인물로 찍혔다. 새 장안에 갇힌 새처럼 순응하면 신상이 편했다. 나는 그야말로 찍소리도 하지 않고 스무 살의 젊음을 나고 있었다.

 

하지만 고향 친구 진희는 달랐다. 음성적인 서클에 가입해 반 유신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진희네 대학은 연일 유신철폐와 민주화 요구 시위에 참가했다. 학교는 긴급조치로 폐쇄되기를 반복했다.

 

동아일보가 보도가 금지된 시위집회 현장을 보도하고 유신헌법이 잘못되었다는 사설을 내보내자 유신정권은 각 기업체에 압력을 가해 무더기로 광고를 해약하게 했다. 진희는 그때 거리에서 동아일보를 팔았고, 백여 명의 동아일보 기자들이 해직되었을 때는 해직 된 기자들이 만든 출판사에서 무료로 교정을 봐 주었다. 학교가 폐쇄되면 불광동 소년원으로 가 그곳 아이들의 교화에 힘쓰고, 구로공단에 취업해 그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지를 일깨워주었다.

 

한번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경찰에 쫓기던 진희가 나를 찾아왔다. 그날 뒷방에 숨어 각 학교에서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들려주었다. 진희는 내 집에 이틀을 머물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뒤에도 서너 번 내 집에 묵었다가 갔다. 나는 진희가 무슨 일을 하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민주화 투쟁을 하던 사람들 이름까지 다 알고 있었다.

 

진희의 영향으로 나는 민주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카페에 가입해 활동을 하고, 가끔 모임에도 나갔다. 대통령 선거 경선 때는 잠실운동장에 가서 내가 찍고 싶은 인물을 직접 뽑기도 했다. 진보정권이 탄생하자 마치 내 손으로 대통령을 만든 것처럼 기뻤다.

 

하지만 국민은 이상적인 진보정치를 외면하고 다시 보수 정권을 택했다. 국민의 의식은 저 만큼 앞서가는데 정치는 다시 유신시대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듯 했다. 결국 국정농단 사태가 일어나고 촛불혁명이 일어났다. 나는 엄동설한에도 매주 집회에 참석했다. 촛불혁명이 성공하고 그 결과 문재인정권이 탄생했다.

 

새 인물들이 등장했다. 대통령을 비롯한 새 인물들은 예전에 진희와 함께 유신철폐 주장을 하며 운동을 하던 얼굴들이었다. 어떤 장관은 진희와 같은 학교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같은 학번의 동기였다.

 

“왜 관심이 없어요?”

 

만루의 물음은 끈질겼다.

 

“왜냐하면 내 친구도 민주화 운동을 했었어. 누구는 대통령이 되고 누구는 장관이 되었는데 내 친구는 죽었어. 그것도 고문후유증으로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투옥되었던 진희가 풀려나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진희를 찾아갔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진희 이모였다. 이모는 진희와 진희엄마를 간호하고 있었다. 진희를 간호하다 진희엄마가 쓰러지고 이모가 와서 두 사람을 간호하는 중이라고 했다. 지금처럼 요양사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진희는 누워있는 엄마 옆에 앉아 나사가 풀린 사람처럼 비실비실 웃고만 있었다. 내가 누군 줄 아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아무도 진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어머니가 타계하시자 진희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으로 진희를 찾아갔다. 진희는 만남을 거부했다. 아무리 사정해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십여 년 후 진희의 사망소식이 들려왔다.

 

“새 정부는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는 그 친구를 불러내주었어. 그래서 난 정치에 대한 관심을 끄기로 했어. 신문이나 티브이 뉴스도 안 봐. 스마트 폰으로 주요뉴스만 뽑아서 봐.”

 

“저와 똑 같네요. 왕정이 무너지고 국민투표로 마오당이 정권을 잡자 함께 게릴라 활동했던 그분이 생각나 마오당에서 나왔어요. 게다가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권이 초심을 잃고 무능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는데 실망을 했죠. 네팔의 민주화 운동이 살인 왕정과의 투쟁이었지만 지금은 공산당과의 투쟁이에요. 마오당이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요.”

 

네팔에 큰 지진이 났을 때 세계 각국에서 다투어 구호물자를 보냈다. 그런데 그 물자들이 공항에 쌓여 제대로 국민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정부는 구호물자에 세금을 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내가 신문기사 얘기를 하자 만루는 흥분을 해서 말했다.

 

“도와주겠다는.....구호물자에도 세금을 먹이는 나라..... 국민을 볼모로 돈을 뜯어내겠다는 정부..... 이게 나라에요?”

 

흥분을 하자 만루의 입에서 네팔 말이 튀어나오고 유창하던 한국말을 말더듬이처럼 더듬거렸다. 만루에게 진한 연민을 느꼈다.

 

“ 하지만 저는 여전히 정치에 관심이 많아요.”

 

만루의 얼굴에는 체념과 그래도 버리지 않은 기대가 교차되었다. 만루는 정치 얘기가 나오면 답답하다며 가슴을 쳤지만 정치 애기만 하고 싶어 했다.

 

“그 친구 분요. 민주화 운동하다 만난 친구에요?”

 

“아니야. 고향 친구야.”

 

진희는 내 유년 시절의 우상이었다. 고향 소읍은 진희의 독무대였다. 독창대회에 나가면 최우수상을 받았고, 사생대회 글짓기 대회 웅변대회 하다못해 탁구 선수로까지 나가 트로피를 받았다. 공부도 뛰어나 내내 반장을 했고 고학년 때는 전교회장을 했다. 학급회의 시간에 회의를 이끌어나가는 진희가 특히 돋보였다. 회의 진행은 물이 흐르듯 유연했으며 조리 있는 말솜씨로 학우들을 사로잡았다. 회의를 진행하는 진희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으며 매서운 카리스마로 떠드는 학우들을 휘어잡았다. 나는 진희 앞에 서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왠지 기가 죽었다.

 

내가 그런 진희와 친해진 것은 그 읍에서 우리 둘만 타 지방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부터였다. 진희는 서울에 있는 이화여고에 진학하고, 우리 집은 인천으로 이사해 인천에 있는 여고에 진학을 했다. 가슴에 하얀 배꽃이 새겨진 배지를 달고 읍에 나타나면 진희를 본 것 자체가 그 소읍에서는 큰 뉴스거리였다.

 

그 지방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진희는 전국에서 뛰어난 애들이 모여드는 서울에서도 비범한 학생이었다. 우리는 객지에서 일주일이 멀다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는 일상적인 내용의 편지였던데 비해 진희의 편지 속에는 유신독재 정치를 개탄하고, 동아일보 광고탄압에 대해 분노하고, 민청학련사건을 분개하며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가슴아파했다. 그것을 보고만 있는 대학생들의 무능을 질타하는 내용들이었다. 진희는 격동하는 현대사의 한 가운데서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던 친구였다.

 

셋째 날도 만루가 내 짐을 멨다. 내 짐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 공평하다고 했다. 그날부터 만루는 내 짐 담당이었다. 만루는 짐을 지고 가파른 길을 올라갔다. 스마트 폰의 배터리가 소모되어 사진 찍을 때마다 걱정을 하였더니 랑탕 마을에 가면 충전을 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곳에는 비록 사야하지만 와이파이도 잡힌다고 했다.

 

점점 고도가 높아가니 나의 걸음 속도는 느려졌다. 랑탕트레킹은 거리가 짧은 대신 고도가 갑자기 높아져 고소 증세가 오기 쉬운 코스다. 한 걸음 걷고 쉬고, 한 걸음 걷고 쉬고...숨이 점점 가빠왔다. 만루는 무거운 짐을 메고 끈질기게 기다려주었다. 짐이 무거우니 먼저 올라가라고 아무리 말해도 기다려주었다.

 

숨이 가빠지자 점심 때 먹은 덴뚝이 소화가 안 되고 미식 거렸다. 고소 증세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토할 것 같은 속을 끌어안고 한 걸음 걷고 쉬고, 한 걸음 걷고 쉬었다. 가이드는 무리하지 말고 자기 페이스대로 걸으라고 당부했다. 천천히 비탈을 올랐다.

 

“ 힘내세요. 조금만 더 가면 완만한 평지가 나와요.”

 

나온다는 평지는 안 나오고 오르막길만 나왔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오르막을 오르자 눈앞에 탁 트인 하늘과 평평한 땅이 펼쳐있다.

 

“이렇게 높은 곳에 이런 평원이 있을 줄이야!”

 

“ 이제부터는 길이 완만해요.”

 

만루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내게 말했다. 그곳은 수목한계선이었다. 나무는 모두 키 작은 난쟁이들뿐이었다. 붓꽃이 땅에 붙어 꽃을 피웠다. 군데군데 앙상한 나무들이 뭉쳐 자랐다.

 

마을에 들어서자 줄기차게 들려오던 계곡물 소리가 점점 멀리서 들렸다. 완만한 평지에도 오르막 내리막은 있었다. 지진으로 폭격 맞은 것처럼 부서진 마을은 손도 못 대고 형체가 좀 남아있는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맨손으로 집을 짓고 있었다. 지진이 난지 3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대부분 복구되지 못한 채였다.

 

산모퉁이를 도니 눈앞에 거대한 돌무더기 산이 펼쳐졌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잿빛 돌이다.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달나라 표면 같았다. 산꼭대기부터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가 계곡 아래에 까지 흘러내렸다. 돌무더기 위로 빙하 녹은 물이 상처에 난 진물처럼 흘렀다. 마치 땅이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 같았다.

 

“지진이 나기 전에 이곳은 랑탕히말의 전통마을이었어요. 지난 번 지진 때 저 뒤에 보이는 랑탕리웅의 만년설과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리면서 마을 전체가 눈과 산사태로 묻혀버렸어요. 땅속에는 주민 175명과 외국인 여행자 포터 군인 등 250명이 희생당했어요. 아직도 묻혀 있는 사람이 많아요. 네팔에서 피해가 가장 심한 곳이어요.”

 

잿빛 돌무더기 산을 가리키며 만루가 말했다. 나는 사라진 마을 앞에 서서 말을 잃었다. 누가 랑탕 마을이 아름답다고 했는가. 이젠 수백 명의 목숨을 집어삼킨 비극의 땅이 되어 지도에서조차 사라진 마을이 되었다. 열악한 환경에 순응하고 감내하며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에게 내려진 재해가 너무나 끔찍했다.

 

“여기 좀 보세요.”

 

앞서 가던 만루가 서서 기다리며 나를 불렀다. 흙 한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가 쟁반만한 흙더미를 찾아서 풀 한 포기를 심어 놓고, 밟지 않게 돌멩이로 쌓아 놓았다. 멈추어 서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오로지 혼자 서 있는 풀포기가 외롭고 눈물겨웠다. 이 풀포기 하나로 시작하여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면 이곳이 푸르러질 것이라는 희망처럼 풀이 서 있다.

 

“언젠가는 이곳에도 풀이 자라겠지?”

 

“그러도록 기도해야겠어요.”

 

만루가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히말라야 날씨는 새벽에 별이 쏟아질 듯이 돋아났다. 아침에는 눈부신 해살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뒤덮었다. 그러다가 정오쯤이면 어김없이 구름이 몰려오고, 오후 서너 시쯤 되면 비가 내렸다. 비 오기 전에 로지에 도착해야 한다고 아침 일찍 서둘렀건만 오후가 되니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고지대로 오르자 비는 곧 진눈개비로 바뀌었다. 추우니 숨이 차서 걷기가 힘들었다. 가이드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살살 달래며 위에 있는 로지를 향했다. 로지를 향한 마지막 구간에서는 두통을 동반한 호흡곤란이 나타났다.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부부가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이했다. 부엌 한 가운데 화로가 있었다. 주인남자가 누런 풀 뭉치를 불쏘시개로 하여 화로에 불을 피웠다. 누런 풀 뭉치는 주인 남자가 시간이 날 때마다 주워 말린 야크 똥이었다. 부엌 정면 벽에 티벳 옷을 입은 노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만루와 한참 말하던 가이드가 말했다.

 

“이 부부의 남편은 랑탕 사람이고 아내는 에베레스트가 있는 쿰부사람입니다. 카트만두로 돈 벌러 나갔다가 만나 결혼해 살다가 지진 소식을 들었대요. 저 사진은 남자의 어머니인데 지진 때 누이랑 밭에서 일하다가 돌무더기에 깔려 죽었어요. 아직도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고 해요.

 

부부는 고향을 지켜야 한다고 이곳으로 와 로지를 짓고 손님을 받고 있어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요.”

 

가이드 말을 들으며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슬픔도 기쁨도 없었다. 그저 담담했다. 가이드가 말을 이었다.

 

“이곳은 스마트폰 충전이 됩니다. 충전은 공짜고 와이파이를 쓰려면 5000원입니다. 쓸 사람은 말씀하세요.”

 

랑탕 트레킹을 올 때 나는 와이파이가 안 되는 곳에 단 며칠이라도 있고 싶었다. 소통의 홍수 속에서 소통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일행 중 아무도 와이파이 신청을 하지 않았다.

 

쿰부댁 음식솜씨는 형편없었다. 일행들은 각자 배낭 속에서 먹을 것을 꺼냈다. 마른 된장국이 나오고 깻잎과 무말랭이가 나왔다. 누른지도 나오고 단무지도 나왔다. 많은 밑반찬을 준비해서 히말라야 꼭대기까지 가져온 일행들의 얼굴이 모두 보살처럼 보였다.

 

3600 미터 고지에서 나타나는 증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일행 하나는 먹으면 속이 미식거리며 구토가 난다고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또 다른 일행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무기력하다고 호소했다. 나는 고소증이 두통으로 나타났다. 공처럼 부풀어 오른 초콜릿 봉지처럼 내 머리 속의 뇌도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았다. 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룸메이트는 불면도 고소증상인가 보다며 뒤적거렸다. 손발이 저릿하고 피곤이 몰려왔지만 나 역시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돌무더기 위에 누군가가 심어 놓은 풀 한포기가 자꾸 생각났다. 과연 그 폐허가 된 땅에서 죽지 않고 견뎌낼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암흑기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진희의 모습이 그 위로 오버랩 되었다. 진희가 풀포기로 환생한 듯 했다.

 

 

‘김포초등학교 55회 유진희 별세. 장례식장 우리병원. 발인 21일. 장지 양곡 선영’

 

 

동창회장이 문자로 진희의 죽음을 알려왔다. 장례식장에 달려갔을 때는 이미 동창이란 동창은 다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며 진희의 죽음을 애도했다.

 

“내가 버스 차장할 때 진희가 내 버스를 탔어. 내릴 때 진희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어. 난 네가 자랑스러워하고. 진희가 버스 차장 하는 내가 자랑스럽다니. 어디선가 내가 차장하며 동생들 공부 가르친다는 소리를 들었나 봐. 그리곤 진희는 말했어. 난 네게 왠지 부끄러워.”

 

아들 딸 둘을 잘 키워 억척으로 소문이 난 동창이 말했다.

 

“난 내가 자취하며 학교를 다녔잖아. 도시락 반찬은 언제나 고추장과 짠지였어. 나는 늘 반찬통을 가리며 밥을 먹었지. 근대 진희가 와서 자기 도시락에 있는 장조림과 달걀말이를 내 밥 위에 쏟아주었어. 그리고는 짠지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처럼 먹었어. 맛있다 정말 맛있어 하며..... 나는 장조림과 달걀말이를 눈물을 흘리며 먹었어. 아마도 지금 나를 있게 한 것은 진희가 준 장조림과 달걀말이였을 거야.”

 

음식점을 해서 성공했다는 동창이 말했다.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진희가 담임 선생님과 함께 왔어. 진희가 와서 아무 말 없이 나를 한참을 안아주었어. 안아만 주었는데도 내 가슴 속에 있던 슬픔의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더라.”

 

“학교 앞에 배 밭이 있잖아. 배 먹으러 간다고 진희와 공부 잘 하는 애들끼리 배 밭으로 가더라. 나도 가고 싶었지만 거기에 끼지 못했어. 근데 진희가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는지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았어. 같이 배 먹으러 가자면서..... 진희와 함께 배 먹으러 간 날이 내 기억 속에 몇 안 되는 즐거운 기억이야.”

 

동창들의 진희에 대한 회고는 끝이 없었다.

 

진희 생각을 하며 잠 못 들고 뒤척거렸다. 지금 내가 소설을 쓴다고 앉아있는 것도 다 진희의 영향이다. 중1 백일장에서 나는 장원을 하고 진희는 가작을 했다. 내가 진희보다 잘한 유일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문학을 꿈꾸었다. 노트에 늘 무언가 끄적거렸다.

 

언젠가 내가 진희에게 말했다.

 

“넌 가난하고 못 가진 자들의 위한 정의로운 정치가가 될 거야.”

 

그러자 진희는 말했다.

 

“ 넌 세상을 감싸 안는 따뜻한 글을 쓰는 소설가가 될 거야.”

 

나는 진희의 말대로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그런데 진희는 꿈도 펴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저 세상으로 갔다.

 

진눈개비가 휘날리는 산에 앉아 내가 울고 있었다. 그때 따뜻한 손이 내 얼굴에 닿았다. 돌아보니 진희였다. 진희는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진희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어디 갔다가 왔냐고 물었지만 말이 없었다.

 

진희는 하늘을 훨훨 날았다. 나는 울면서 진희 뒤를 날았다. 진희는 가끔씩 멈추어 서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눈부신 만년설과 흘러내리는 빙하. 타르초와 룽따가 바람결에 나부끼는 강진리. 진희와 나는 랑탕리웅 나야강 강첸포 계곡 사이를 지나 체르코빌 팸탕 가르포리 걈슝빙하 랑사시리 카르카.... 랑탕의 설산들이 겹겹이 파노라마로 펼쳐져있는 설산을 자유롭게 날았다.

 

진희와 함께 설산 꼭대기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진희의 장례식장이였다.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동창들을 보며 진희가 말했다.

 

“ 난 이미 중학교 때 내 꿈을 펼쳤어. 정치...그거 별거 아냐. 슬프고 외롭고 힘들고 소외당한 사람들 편에 서 주는 거야. 그 사람들 편에 서서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정치야. 친구들이 나를 그렇게 추억해 주잖아. 나는 이미 중학교 때 작으나마 내 꿈을 이루었어. 난 괜찮아. 그러니 울지 마.”

 

진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설도 정치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슬프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소설이고 문학이고 예술이야. 넌 그런 소설을 써.”

 

진희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설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진희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진희는 랑탕리움의 웅장한 산을 향해 훨훨 날았다.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 더 이상 진희를 쫓을 수 없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진희를 애타게 불렀다. 쫓아가려고 발버둥치지만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진희야. 진희야! 애타게 부르다가 잠에서 깼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아직도 진눈개비가 오나 싶어 숙소의 문을 열어 본 나는 깜짝 놀랐다. 고요한 신 새벽의 드넓은 하늘에는 크고 작은 보석이 박혀 저마다 찬란한 빛을 쏟아냈다. 랑탕리웅 산꼭대기로 은하가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새벽마다 히말라야 꼭대기에서는 이렇게 별들이 모여 향연 벌리고 있었구나! 나는 나도 모르게 별빛이 쏟아지는 평원으로 달려 나갔다. 세상에 별과 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꿈속에서처럼 내가 진희와 하늘 한 가운데로 둥둥 떠가는 것 같았다. 너무나 황홀하여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7시간 이상을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8시간 버스로 달리고 3일을 걸어서 여기에 왔다. 랑탕리웅은 머리가 무거울 정도로 무수히 많은 별을 이고 있었다. 얼마나 영롱한지 움찔 하고 건드리면 별들이 우수수 쏟아질 것만 같았다.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보다가 언제 들어와 누웠는지 모르겠다.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창밖이 환했다. 창을 열어보니 설산 꼭대기가 감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잠시 후 설산 위로 아침 해가 떠올랐다. 햇살을 받은 맞은편의 설산들이 수런수런 깨어났다.

 

밤새 충전이 되어 배터리가 넉넉한 스마트 폰을 들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바람 한 점 없이 따뜻한 아침이다. 푸른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은 맑고 투명하다.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방목한 야크가 어슬렁거리며 코를 땅에 박고 조금도 쉬지 않고 풀을 뜯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바구니를 들고 야크 똥과 말똥을 줍고 있었다. 평화롭고 한가로운 랑탕의 아침이다.

 

촬영을 하고 로지에 들어갔을 때 아침밥을 기다리고 있던 일행이 만루 곁에 모여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니 가이드가 얼른 오라고 손짓을 하며 말한다.

 

“드디어 만났어요.”

 

스마트폰 속에는 문재인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나란히 도보다리 위를 거닐고 있다. 27일에 남북 정상회담이 있을 거란 뉴스를 보며 여행을 떠나왔다. 바로 오늘이 그날이었다. 히말라야 꼭대기에서 역사적인 판문점 정상회담을 보다니 꿈이 아닌가 싶었다.

 

“지금 생중계하는 거예요.”

 

만루가 말했다. 카메라는 두 정상이 담소를 나누며 다리 위를 걷고 있었다. 두 정상이 도보다리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원격조정으로 촬영을 했는지 소리는 들리지 않고 새소리만 들렸다. 박새소리. 이에 질세라 꿩이 꿩꿩 하고 노래했다. 그 뒤로 직박구리 소리. 청딱따구리 소리. 또 이름 모를 새들이 모여 합창을 하며 정상회담을 축하해주는 것 같았다.

 

“코리아 통일되는 거예요?”

 

만루가 엄지 척 하며 말했다.

 

“ 막 걸음마를 시작한 거지.”

 

우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짐을 정리해서 포터들과 함께 로지 밖에 나갔다. 자고 일어나니 고소에 적응이 되어 일행 모두 상쾌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랑탕 트레킹의 백미는 문두에서 강진콤파 가는 길이다. 고원의 봄 들판은 푸른 기운이 감돌고 설산으로부터 흘러내린 작은 시내들이 지줄 대며 물줄기를 찾아 흘렀다. 촉촉이 젖은 땅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작고 아름다운 꽃송이를 수줍게 피워 올렸다. 우리는 평원을 가로질러 설산을 향해 걸었다.

 

3700 미터에 있는 강진콤파에 도착했다. 이곳은 빙하 녹은 물을 떨어뜨려 발전기를 돌리고, 넓은 평지에는 헬기장이 있어 고지지만 랑탕에서는 제일 큰 마을이다. 그럴 듯한 독일빵집이 있고 커피머신이 있어 원두커피도 팔았다. 티벳인이 운영하는 한국식당에 가서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한국 쌀로 지은 밥과 김치찌개를 먹었다. 이 모든 것이 발전소와 헬기가 있어 가능했다.

 

4773미터인 강진리로 향했다. 손끝이 저려오고 투통이 오긴 했어도 김치찌개 덕분인지 견딜 만했다. 가파른 길을 두 시간쯤 힘겹게 오르니 강진리다. 경전을 깨알처럼 적어 오색 천에 매달아놓은 타르초와 장대에 매달아 놓은 오색 깃발 룽다가 일행을 환영하듯 나부낀다. 강진리에 섰다. 아! 이 기시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떠나오기 전 인터넷에서 미리 검색해 보았던 설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있다. 꿈에 진희와 함께 날았던 그 봉우리들이다. 진희가 날아간 랑탕리웅이 수많은 봉우리들을 거느리고 호령하듯 서 있다. 캄슝빙하가 거대한 물줄기처럼 흘러내린 계곡이 발아래 보인다.

 

오색으로 된 룽다와 초르텐이 바람에 날렸다. 아무리 지우려고 애써도 응어리로 남아있던 진희에 대한 슬픔이 오색의 깃발 따라 날아갔다. 울지 마. 어디선가 진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젠 너를 생각하며 아파하지 않을게. 이토록 아름다운 랑탕 꼭대기에서 너를 보낼 수 있어 다행이야. 너와 같은 투사들이 온 몸을 던져 이루고자했던 민주주위가 이 땅에 활짝 꽃 필거야. 잘 가. 진희야!

 

진희가 날아간 랑탕리웅 봉우리를 흰 구름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