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추위 (한국소설12월호)
첫추위
강 명 희
옷장 속을 아무리 찾아봐도 오리털 파카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겨울 끄트머리에 어딘가에 쑤셔 박았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뒤죽박죽된 옷장 속에서 두툼한 털모자 하나를 찾았다. 할 수 없이 옷이란 옷은 다 껴입었다. 그래도 몸이 으스스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빙하가 줄어든 것이 한반도에 한파를 몰고 온 원인이라고 기상 게스트는 말했다. 북극의 면적이 줄어들면서 북극해의 수분 증발이 심해지자 시베리아벌판에 적설량이 증가하고, 쌓인 눈이 극지방 공기의 세력을 강화시켜 한반도까지 한파가 찾아온 것이라고 기상도를 집어가며 길게 설명했다. 게스트는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있었지만 모자를 쓰지 않은 맨머리였다. 몹시 추워 보였다.
수도가 얼었어.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나온 나를 보며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는 주전자에 물을 끓여다 수도꼭지에 붓고 있었다. 수돗가가 수증기로 하얬다. 말 할 때마다 할머니 입에서 하얀 수증이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물고기가 뻐끔뻐끔 공기방울을 내뱉는 것 같았다.
커다란 돌멩이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머릿속이 흔들렸다. 제기럴. 간밤에도 나는 술을 마셨다. 맥주 한 모금에도 열병 앓는 환자처럼 온 몸이 붉어지는 체질이라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서영이 떠나고 부터는 술을 마셔야지만 잠을 잘 수 있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세 잔이 되더니 이젠 양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전히 알코올이 온 몸을 붉게 만들었지만 나의 주량은 점점 늘어났다.
술을 마시고 서영이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페이스 북은 이미 계정이 없어졌고 카카오 톡에서 그녀는 이미 (알 수 없음)이 되었다. 그녀는 웨딩마치가 울리는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 잠수를 탔다. 잠수 타기는 어렵지 않았다. 전화번호 하나만 바꾸면 모든 것은 없어졌다. 나를 향해 24시간 열려 있던 전화기 속에는 비음이 약간 섞인 그녀의 어리광스러운 목소리가 아닌, 차가운 전자음성이 그 번호가 결번을 알려주었다.
서영이는 병든 아버지와 팔십이 넘은 할머니를 못견뎌했다. 뿐만 아니라 다섯 살 때 돌아가셔 내게는 기억조차 없는 어머니까지 못마땅해 했다. 내가 썩 좋은 결혼 조건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사주 카페의 늙은 여자는 우리의 궁합이, 특히 속궁합이 꽤 좋다고 말했다. 병든 아버지는 그리 오래 사시지 못할 것이고, 빈 시어머니자리는 고부간의 갈등을 아예 만들지 않을 것이니 좋고, 할머니의 노동력은 살아가는데 꽤 도움이 될 거라고 나는 내 처지를 최대한 포장하여 말했다. 아버지는 의술이 좋아 병원비를 까먹으며 한없이 살 것이고, 고부갈등이 있더라도 시어머니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고, 할머니는 도움이 된다지만 노인은 싫다고 서영이는 내 처지를 한껏 까발려 말했다. 그녀는 오십 이후의 삶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녀의 엄마가 갓 오십이었다.
회사 안 가니? 할머니의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개집으로 가 산이에게 목줄을 채웠다. 할머니는 내가 별채에 들어가고부터 밥 먹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내 방은 할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안채와 떨어져 수돗가 옆에 따로 들인 방이다. 지난번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살았는데 깔끔한 할머니는 그들이 지저분하다고 내보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들이겠다는 것을 안채에 살던 내가 들어왔다. 할머니가 들어와 밥 먹으라고 잔소리를 해 대도 안채에 들어가 밥을 먹지 않았다. 아침에는 시리얼을 우유에 타 먹고 점심은 밖에 나가 대충 때우고 저녁은 아무 안주나 해서 술을 마셨다. 이젠 할머니가 내게 할 수 있는 말은 회사 얘기뿐이다. 오늘은 회사 안 갔니? 어제는 늦게 왔나 보다. 회사 가니? 왜 아직 회사 안가니. 회사에서 무슨 일 있니..... 내가 회사를 그만 두었다는 사실을 알면 할머니는 내게 무슨 말을 할까. 어쩜 내가 회사를 그만 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촉은 용하다는 점쟁이 수준이다.
산이는 밥 주는 할머니에게 열심히 짖었다. 하지만 나만 보면 우우 하며 어리광 소리를 냈다. 손을 달라면 손을 주고, 앉으라면 앉고, 뛰라면 뛰고, 구르라면 구르고, 얼굴을 내밀면 핥았다. 한번은 고기 덩어리를 주자 성급한 마음에 뛰어올라 실수로 내 손을 문 적이 있었다. 그날부터 산이는 먹지도 않고 누워 일주일을 보냈다. 아무리 괜찮다고 어루만져주어도 끙끙 앓았다. 차츰 회복이 되었지만 그날부터 산이는 던져주는 것은 먹지 않고 밥그릇에 있는 것만 먹었다. 밥 주는 사람에게 짖는 놈이 어디 있냐고 할머니는 밥을 줄 때마다 나무라고 타박을 해도 산이는 할머니에게 여전히 짖었다.
그런 산이가 내게 짖을 때가 있다. 새끼를 낳았을 때다. 그때는 누구든지 개집 옆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사납게 짖었다. 왈왈왈왈. 다른 때는 컹컹거리며 높은 소리를 내지만 이때는 낮은 톤으로 입을 옆으로 찢듯이 벌리고 왈왈왈왈 사납게 짖었다. 할머니는 설혹 제 새끼 해코지 할까봐 그런다고 그런 산이를 엄청 대견해 했다. 할머니는 딸 산후조리 하듯이 정성껏 미역국을 끓여다가 밥그릇에다 담고 긴 꼬챙이로 밀어주었다. 똥도 개 집 밖에서 쇠스랑으로 긁어냈다. 그러다가 새끼들이 눈 뜨고 돌아다니면 산이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내게 다시 공손해졌다. 하지만 할머니에게는 그때나 이때나 여전히 짖었다.
산이를 데리고 얼어붙은 공기를 가르며 들길을 걸었다. 까마중 군락은 삶아놓은 것처럼 축 늘어졌다. 감나무는 감 몇 개를 매단 채 서 있고, 미처 잎을 떨구지 못한 밤나무는 이파리에 서리꽃을 하얗게 피우고 달달 떨 듯이 서 있었다. 배추는 하얀 서릿발을 세우고 짱짱하게 서 있다. 북극한파가 몰려올 것이라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대던 일기예보에 할머니는 무는 뽑아 들였지만 배추는 거두지 않았다. 배추는 날이 풀리면 다시 살아난다고 했다. 한번 추웠다고 고꾸라지는 놈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들이라며 오그라들어 잎이 검어진 가지와 고추를 보며 나무라듯이 말했다.
배추는 추위에 질린 듯 퍼랬다. 퍼렇다 못해 검푸르다. 산이는 검푸른 배추들 사이를 천방지축 뛰어다녔다. 나는 산이와 함께 고랑을 뛰어다녔다. 배추 잎이 바짓가랑이를 스칠 때면 언 이파리가 닿아 버석거렸다. 배추는 날이 풀리면 과연 할머니의 말씀대로 다시 제 색을 찾을 수 있을까? 나도 언젠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서영이와 헤어지기 이전으로 말이다.
문자가 왔다.
‘오늘 시간이 돼?’
중장비회사 김 씨 아저씨다. 중장비 일을 하다가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는 마트에 들어간 것은 서영이 때문이었다. 직장이 없으면 결혼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서영이는 중장비 일은 직장으로 여기지 않았다.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은 별로 없었다. 근처 마트에 이력서를 내니 임시직으로 채용 되었다. 생선코너에서 한 달 일하다가 야채코너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과일코너로 옮겨지고 어떤 때는 카트 관리를 했다. 그러한 일을 견딘 것은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가 떠나자 마트를 그만 두고 김 씨 아저씨를 찾아가 다시 일하겠다고 말했다.
“아가씨가 회사 다니는 것을 원한다며 왜 그만 뒀어?”
김 씨 아저씨가 물었다.
“깨졌어요.”
아저씨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일이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김 씨 아저씨는 내가 작업을 하면 뒤처리 할 것 없이 깔끔하다고 만족해하셨다.
마트를 나온 이후 김 씨 아저씨의 첫 콜이다.
나는 개 목줄을 잡아당기며 김 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산이는 더 뛰고 싶은지 목줄을 늘리며 앞으로 나가려고 애썼다.
“수도가 얼었는데 일 할 수 있어요?”
“이깟 추위쯤이야 괜찮아.”
김 씨 아저씨는 북극 한파가 대수롭지 않은 듯 명쾌하게 말했다. 김 씨 아저씨는 일이 들어오면 기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일당 계산을 해서 주었다. 나는 처음에 김 씨 아저씨를 따라 다니며 일을 배웠다. 한번은 하루 종일 덤프트럭에 소똥을 싣는 작업을 했다. 작업을 마치고 똥으로 범벅이 된 포크레인을 말끔히 닦아 놨더니 그때부터 김 씨 아저씨는 아들처럼 보살펴주었다. 이번에는 공사장의 흙을 파다가 논을 메꾸는 일을 맡았다고 했다.
“논을 흙으로 채워놨으니 고르게 펴. 그리고.... 알지?”
나는 얼른 알아차렸다. 김 씨 아저씨와 일하고부터 ‘그리고 알지?’는 둘만의 암호였다. 땅 속에 들어가는 폐기물이 있을 때는 그런 식으로 사인을 주곤 했다. 준비하고 가겠노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들어가 있어 내일 또 산책 시켜줄게. 일 나가야 해.”
더 산책하고 싶어 들어가지 않으려는 산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산이는 족보가 있는 진돗개 순종이다. 삼각형의 얼굴에 역삼각형 모양의 귀가 솟은 듯이 붙어있다. 눈처럼 하얀 얼굴에는 막 익기 시작한 검붉은 포도모양의 눈이 박혀있다. 코끝은 검정콩처럼 새까만 것이 늘 촉촉이 젖어 반짝거렸다.
산이는 내가 본 진돗개 중에서 제일 날씬하고 예쁘다. 내가 만난 여자 중에서 서영이가 제일 날씬하고 예뻤던 것처럼..... 어떤 때는 산이가 서영이 탈을 쓰고 앉아있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서영이가 산이 탈을 쓰고 개집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산이는 알겠다는 듯이 내 얼굴과 목을 마구 핥았다. 그럴 때면 서영이의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얼굴을 산이에게 맡기고 손으로 산이의 목과 배를 어루만져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산이와 키스라도 하고 싶었다. 아니 섹스라도 하고 싶었다. 내게 끊임없이 무엇인가 요구하는 서영이에 반해 산이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오로지 뜨거운 사랑만을 보냈다. 만일 서영이가 요구하면 병든 아버지와 할머니를 노인 병원과 요양원에라도 보냈을까? 하지만 그녀는 거기까지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떠났다.
중장비 회사 주차장에다 차를 주차 시켰다. 아직도 굴러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김씨 아저씨의 낡은 차가 보였다. 유리창 밖을 내다보고 섰던 김 씨 아저씨가 나오더니 오랜만이라며 반기며 오늘 작업할 논의 위치를 설명했다. 젠장! 왜 하필이면 거기란 거야. 김 씨 아저씨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그곳을 안다. 계곡이 흘러내리는 곳에 자연스럽게 다랑이 논이 만들어졌다. 어느 날인가부터 그곳이 메꾸어지기 시작하더니 하나 둘 전원주택이 들어섰다. 또 누군가가 전원주택을 지으려고 논을 메꾸는가 보았다. 그곳은 사람의 인적이 드물 뿐 아니라 경관이 좋아 서영이와 자주 갔던 곳이다.
포크레인 운전석에 앉았다. 김 씨 아저씨가 조그만 보온 통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오늘 점심이야. 그곳은 외져 점심 먹으러 나올 수가 없어. 그러니 이거라도 먹고 해.”
보온 통을 열어 보았다. 따뜻한 치킨이 냄새를 풍기고 들어있었다.
김 씨 아저씨가 가르쳐 준 곳으로 포크레인을 몰고 갔다. 산 쪽을 향해 오르자 김 씨 아저씨가 말한 대로 군데군데 흙을 쌓아놓은 논이 있었다.
해가 짧아 하루 안에 마치기에는 다소 많은 일의 분량이었다. 아침의 매운 추위가 햇볕이 내리쪼이자 땅을 녹여 일 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포크레인을 몰고 넘어질 듯 수북이 쌓인 흙 위로 올라갔다. 겉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가운데에 온갖 잡동사니가 뒤섞인 건축 폐기물이 보였다. 그것을 밑으로 넣고 가장자리에 쌓아놓은 흙을 덮으라는 김 씨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기어를 넣자 포크레인은 거인 같은 팔을 뻗어 우악스럽게 흙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로버트처럼 뒤뚱거리며 팔을 180도로 돌려 폐기물 위에 쏟아 부었다. 흙더미도 돌멩이도 나무뿌리도 포크레인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폐기물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 위에 깨끗한 흙을 덮고 편편하게 폈다.
열 살 때 멀리 보이는 앞산이 벌레가 파먹는 것처럼 점점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어느 날 일부러 자전거를 타고 그곳에 가 보았다. 포크레인과 블도저 몇 대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흙 뿐 아니라 돌덩이나 나무도 포크레인의 우악스러운 손에 의해 순식간에 패이고 뽑혀서 눈앞에서 사라졌다. 산이 평지가 되어 세상이 뒤집혀진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지구가 만들어질 때의 땅의 모양이 중장비기사로 인해 바뀌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마치 조각가가 작품을 만들 듯이 중장비 기사는 지구를 맘대로 조각하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중장비 운전사를 꿈꾸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중장비 기사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포크레인을 하나 사서 중장비회사에 가지고 들어가면 수입도 괜찮을 것 같았다. 포크레인을 장만하겠다는 꿈은 서영이로 인해 무너졌다. 그녀는 포크레인 기사를 송충이 보듯이 싫어했다.
구겨진 휴지뭉치처럼 울퉁불퉁했던 땅이 평평해졌다. 하루 종일 작업한 결과 논이 넓은 밭으로 변했다. 밭에는 폐기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토질이 좋은 땅인 양 포장 된 땅 위로 노을이 고즈넉이 지고 있었다. 포크레인을 몰고 운동장처럼 평평해진 땅을 다지며 돌아다녔다. 할 수만 있다면 상처투성이의 내 가슴에 새 살을 넣고 깔끔히 포장하고 싶었다.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먹물 같은 어둠이 풀어져 내렸다. 어둠과 함께 다시 추위가 몰려왔다.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눈물이 났다. 나는 포크레인 운전석에 앉아 들짐승처럼 울었다.
나는 서영이가 떠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와 만나면 우린 이곳에 와서 섹스를 했다. 처음에는 모텔을 들락거렸지만 들락거릴 때마다 쑥스러웠고 무엇보다 돈이 들었다. 그래서 주로 이곳에 차를 세워놓고 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밖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벌레소리가 흥분을 더해주었다. 그러면 내가 꽃이 만발한 꽃나무가 된 듯도 하고 짝짓기를 하는 동물 같기도 했다. 그리고는 내가 쏟아놓아 정액이 흥건히 묻은 그녀의 그곳을 손수건으로 말끔히 닦아주었다. 그녀는 언제나 만족해했고 ‘내일 만나’ 하고 내 귓불을 깨물며 속삭이곤 했다.
서영이는 지난달에 결혼했다. 문자로 그 사실을 알려왔다. 온 몸을, 그야말로 자궁 속까지 내게 맡기고 매달리며 헉헉거리던 그녀는 눈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순백의 미소를 띠우며 웨딩마치에 맞춰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걸어 나갔을 것이다.
“ 왜 이렇게 늦었어?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
김 씨 아저씨가 안도의 얼굴을 하며 말했다. 나는 작업량이 많아 생각보다 늦어졌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해장국이 종일 비어있던 몸 안으로 들어가자 언 몸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왜 치킨 안 먹었어?”
김 씨 아저씨가 물었다.
“잊었어요. 먹는 걸....”
“아직도 여자 때문에 그래?”
김 씨 아저씨가 물었다. 나는 서영이가 결혼했다는 사실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남은 해장국물을 마셨다.
“잊으면서 사는 거야. 독하게.... 아들이 형체도 없이 길바닥에 깔려 죽었는데도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더라고. 그뿐인 줄 알아? 아들 목숨 값을 다 사기 당했는데도 밥이 넘어가더라고. 그러보니 독해. 내가...아니 인간이...그래.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해.”
김 씨 아저씨는 교통사고로 삼대독자인 아들을 잃었다. 보험회사에서 아들 사망보상금으로 꽤 많은 금액이 나왔다. 돈을 처음 만져본 그의 아내가 아들 목숨 값을 다단계 회사에 투자했다. 오부 이자가 매달 입금이 되자 그의 아내는 주변 사람들 돈까지 끌어다가 투자를 했다. 어느 날 다단계 회사 대표가 잠적을 했다.
“물론 처음에는 살 수가 없어 죽으려고 했지. 방을 테이프로 밀봉을 하고 연탄을 피웠어. 그런데 초롱초롱한 눈을 뜨고 딸내미가 방긋방긋 웃으며 내 품을 파고드는 거야. 딸 눈망울을 보며 죽겠다는 각오로 다시 살아가자고 아내와 약속 했지.
애 엄마는 그날부터 파출부를 나갔어. 그때 친척이 딱한 사정을 듣고 식당을 함께 하자고 했어. 한가한 오전에는 친척이 하고 오후엔 함께 하기로 했지. 자본이 좀 든다는 거야. 그 얘기를 듣고 파출부 나가는 집 주인이 빌려 주었어. 식당이 생각보다 잘 되더라고. 집 주인에게 빌린 돈을 조금씩 갚았어. 오십만 원이 남았을 때 주인이 그러더래. 그건 갚지 말라고. 세상을 열심히 살아내라는 격려금이라고. 오십만 원 그거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누구에게는 살아내는 힘이 되더라고.
누구는 아들 목숨 값도 떼먹고 잠적하는데 누구는 격려금을 주고....그래서 세상은 살아볼 만해. 안 그래?”
김 씨 아저씨는 노가다 판 사람답지 않게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전혀 마시지 않았다. 일이 없을 때 둘러앉아 하는 화토도 치지 않았다. 가끔 폐기물을 땅 속에 묻는 것 빼고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술이 마시고 싶었다. 김 씨 아저씨는 차를 가져왔으면 안 된다고 단호히 말했다. 매일 다니는 시골길이고 게다가 그쪽은 단속을 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해장국 집에서 나올 때 김 씨 아저씨는 집에 가서 마시라며 소주병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술병이 든 비닐봉지를 조수석에 던져놓고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기어를 드라이버로 놓으려다 멈추고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카카오 톡이며 동창회 밴드며 페이스 북에는 쓸데없는 것들만 가득 들어있다. 넘기다 보니 영준이로부터 톡이 하나 들어와 있다. 영준이는 재작년 첫사랑과 작살이 났다. 죽어버리겠다고 자살카페를 찾아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내가 찾아내 끌고 온 녀석이다. 말하자면 내가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그때 녀석은 첫사랑과의 이별은 자식의 죽음만큼 혹독하다고 진지하게 말했었다.
‘서영이와 깨졌다며? 잘 된 거야. 걘 얼굴만 예쁘지 다른 건 다 별루였어. 무말랭이처럼 말라 비틀어져 애라도 낳겠냐. 아마도 지금쯤 넌 금방 죽을 것처럼 징징대며 그 애의 흔적을 찾아 헤매고 있겠지.’
어떻게 알지? 꼭 어디선가 나를 들여다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늘에 농구공만한 보름달이 떠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랑은 중독이야. 사랑의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하는 것이 가장 빠른 거야. 이건 내가 먼저 경험해 얻은 진리야. 여자를 만나봐. 네게 딱 소리가 나게 맞는 여자가 있어. 소개 시켜 줄게.’
싸가지 없는 놈! 불 난 집에 부채질 좀 작작해라. 좀 일찍 이별을 경험했다는 것만으로 사랑에 대해 족집게 선생이라도 된 듯이 가르치려는 녀석이 역겹다. 문자를 씹기로 했다.
메론을 켜고 브루투스에 연결시켜 음악을 틀었다. 카오디오에서 음악이 튀어나왔다. 심장이 멈춰도 이렇게 아플 것 같지 않아. 어떻게 좀 해줘. 날 좀 치료해 줘. 이러다 내 가슴 다 망가져. 총 맞은 것처럼.......남자가 짝을 잃고 울부짖는 사자처럼 노래한다. 과감하고 직설적이고 이색적인 저음이 송곳처럼 내 뇌를 후벼 판다. 그것도 모자라 진물이 흐르는 상처에 남자의 목소리가 소금을 뿌리고 뭉갠다. 눈물샘이 터지니 콧물까지 쏟아져 진다. 찔찔 짜면서 빨리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빨리 빨리 늙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서영이를 잊을 수 있을까.
초등학교 동창인 서영이는 무지 예뻤다. 그녀를 만나면 행복했다. 조금 덜 예쁘고 조금 덜 행복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요구하는 것이라면 앞 뒤 따지지 않고 무조건 따랐다. 어쩜 사랑에는 적당한 밀당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그걸 잃은 것은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에 골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산으로 들로 심지어는 바다로까지 몰려가 단풍놀이 한다고 북새통을 이루며 들끓던 날이었다. 나는 서영이와 수목원으로 단풍구경을 갔다가 오는 길에 카페를 들렀다. 그날 서영이는 그녀답지 않게 약간 시니컬한 분위기를 잡더니 말했다.
“나 떠나.”
“어디 여행 가?”
“바보야! 그게 아니고”
“아니면 어딜 간다고 그러는 거야.”
“우리 헤어지자고.”
“뭐? 헤어져? 누가. 우리? 속궁합이 무지 좋은 우리가 왜?”
“결혼은 속궁합만으로 살아갈 수가 없어.”
“결혼이 별 거야?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는 것이 결혼이잖아.”
“그렇지 않아. 결혼은 사랑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거야.”
“ 서영아. 너 뭔가 잘못 알고 있어.”
“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야. 사랑에 목숨 걸고 울고불고 하는 거, 그런 건 드라마 속에서나 존재하는 거야.”
나는 서영이가 그렇게 속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가끔 먼 친척 얘기하듯 툭툭 말하던 녀석이 생각났다.
“ .....의사라는 그 사람이니? 아는 오빠라고 가끔 얘기하던....시간이 없어 잠도 못자고 데이트도 못한다는 그 사람?”
“맞아”
맙소사! 서영이가 양다리 걸친 놈이 그놈이라니! 그럼 서영이와 붉게 타오르는 화살나무 뒤에서 나눈 뜨거운 사랑은 이별의 의식이었단 말이야! 어쩐지 너무 서두르며 초짜같이 행동하더라.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지만 서영이는 ‘사랑해’ 라고 말하며 떠났다. 사랑한다는 말이 안녕이란 말처럼 쓰인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나는 서영이가 나와 결혼할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게 땅을 미리 증여를 했다. 측량을 해서 붉은 말뚝을 박아놓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네 땅이다 말했다. 그리고 등기이전을 해 주고 서영이에게 보여주라고 은근히 가르쳐주었다. 이 집은 내가 죽으면 당연히 네게 상속이 되는 거야. 비록 시골이지만 집과 땅이 있는 신랑감은 꽤 좋은 결혼조건이라는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당뇨를 앓다가 후유증으로 신장이 망가졌다. 이틀 걸러 투석을 하는 아버지는 당신이 죽기 전에 아들을 결혼시킬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의사라는 사실이 거대한 공룡처럼 나를 짓눌렀다. 비정규직으로 2년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 준다는 회사와의 약속도 서영이가 떠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키 재기는 비슷할 때 하는 것이지 눈으로 확연히 드러나면 재 볼 필요조차 없다. 서영이가 의사와 나를 놓고 재 보지도 않았을 거란 사실에 나는 절망했다. 아무리 사랑하고 궁합이 좋다고 해도 스펙 앞에서 나는 그저 구질구질하고 초라한 루저일 뿐이었다.
서영이의 이별 통고는 내게 느닷없이 당한 교통사고 같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비로소 서영이가 떠났음을 느꼈다. 눈물이 났다. 서영이 없는 세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했다.
며칠 전에는 차를 몰고 어디론지 한없이 달리다가 밤늦게 편의점에서 소주와 맥주를 사 들고 내 방에 들어갔다. 방은 흐트러진 것 하나도 없이 깔끔히 치워져 있었다. 무엇보다 수북이 쌓아놓은 맥주 캔과 소주병이 말끔히 사라졌다. 보일러가 적당히 돌아 땅바닥이 따뜻했다.
차 소리를 듣고 안채에서 할머니가 건너왔다.
“밥은 먹었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느이 아버지는 나중엄마가 떠난 후 매일매일 술에 빠져 살았어. 그러다가 저 지경이 된 거야.”
할머니는 새 엄마를 나중엄마라고 불렀다. 나는 새 엄마건 나중 엄마건 한 번도 엄마란 소리를 하지 않았다.
“너도 느이 아버지처럼 그럴 거니?”
“내가 술을 먹든 밥을 먹든 할머니는 상관하지 마세요.”
나는 할머니께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난 네 아버지에게도 엄마지만 네게도 엄마야. 느이 엄마가 죽은 후 네 살 때부터 줄 곳 널 키웠으니까. 나중엄마한데 갔던 몇 년 만 빼고.....그런데 어떻게 상관 말아.”
할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무너지듯 땅바닥에 앉아 한 손으로 가슴 한 복판을 문지르며 말했다.
“할머니 여기가 아파. 아파서 죽을 거 같아”
할머니가 나를 끌어안았다. 어린애처럼 할머니께 안겨 울었다.
“아이고 내 새끼! 내 새끼. 난 첨부터 그 아이 맘에 안 들었다. 너무 마르고 까칠 한 것이 나중엄마 같더라. 차라리 잘 된 거야.”
할머니가 주저앉아 나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는 할머니의 남자버전이었다. 내가 봐도 신기하게 판박이처럼 똑같다. 아버지도 역시 할머니의 판박이였다. 결국 나는 닮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아버지와 똑같다. 아버지를 닮은 DNA가 내 몸속을 마구 헤집고 돌아다니다가 틈만 나면 언뜻언뜻 드러내 보인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사랑의 힘은 대단하지만 이별의 슬픔은 더 크다. 영준이는 첫사랑과의 이별을 자식을 잃은 슬픔만큼 크다고 비유를 했지만 내게 서영과의 이별은 자식 아니라 내 목숨을 잃는 것만큼이나 괴로웠다.
회사를 그만 두고 서영이와 갔던 곳을 찾아다녔다.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하루는 대천에 가서 일몰을 보았다. 하루는 강릉에 가서 바다를 보았다. 대천에도 강릉에도 그녀는 있었다. 아니 우리가 갔던 모든 곳에 그녀는 있었다. 서영이와 함께 먹었던 먹거리와 함께 들었던 음악에도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이 서영이는 들어와 있었다. 대낮에 그녀와 갔던 모텔에 들어갔다. 그녀를 생각하며 수음을 했다.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나를 가리키며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꿈속에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으면.....
차를 집하고 반대 방향으로 몰았다. 어디를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차를 몰았다. 서영이 떠난 후에는 줄곧 그랬다. 그냥 달렸다. 무심코 달렸는데 서영이와 함께 갔던 공원 옆 카페다. 그곳을 스치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잠수를 탔던 서영이가 기적과도 같이 카페에서 나와 걷고 있다. 어쩜 나는 이런 기적을 꿈꾸며 그녀의 흔적을 찾아다녔는지 모른다. 서영이는 혼자다. 서영이 곁에 차를 세웠다. 그녀가 움찔하며 놀라는 듯 서 있다. 클랙슨을 짧게 울렸다. 망설이듯이 서 있던 서영이 익숙하게 자동차 문을 열었다. 그녀에게서 찬 기운과 함께 낯선 향기가 났다.
차를 출발시켰다. 그녀의 볼이 발그레하게 얼어있었다. 나는 히터를 세게 틀었다. 쉬쉬 소리를 내며 뜨거운 바람이 나왔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산길을 비췄다.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작업한 그 논에, 아니 지금은 밭으로 변한 그곳에 차를 세웠다. 서영이는 이미 김 씨 아저씨가 준 소주병을 열고 물을 마시듯이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더운 기운 때문인지 알코올 때문인지 붉게 물들었다. 차가 멈추자 서영이 반쯤 마신 술병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술병을 받아 그녀처럼 병나발을 불었다.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온 몸으로 퍼졌다. 술이란 때로 이처럼 두려움을 잊게 해 주어 편리하다. 우리는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탐했다. 남의 방을 몰래 점령했다는 죄의식이 등골을 타고 머릿속으로 번져 왔다. 뜨겁고 강렬한 오르가즘이 느껴졌다. 마치 번개 맞은 듯 했다. 이전에 결코 없었던 느낌이었다.
“산이 아직도 할머니한테 짖어?”
옷매무새 고치며 서영이 물었다.
“응.”
“나는 아무래도 산이 닮았나봐.”
“어째서?”
“내 몸은 산이처럼 한 사람에게만 반응해. 나에게 밥 주는 사람에게는 반응을 안 해. 전혀 안 해. 그래서 난 밤이 무서워. 그 남자와 결혼한 걸 후회해. 어쩌면 좋아. 우리 이렇게 살면 안 될까?”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도 산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것을 한 번도 거역하지 않았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그녀가 얼굴을 내밀면 핥고, 그녀가 가랑이를 벌리면 섹스를 하고, 떠나라 하면 떠났다. 지금 그녀는 이렇게 죄를 지으면서 살면 안 될까 하고 묻고 있다.
어쩜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삶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어차피 그녀를 잊지는 못할 것이고, 아버지처럼 나를 파괴하지도 못할 것이라면, 도둑처럼 남의 방을 조금 빼앗아 살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리라. 이렇게 사는 것이 그녀와 나의 운명이라면 거역하지 않겠다. 김 씨 아저씨 말처럼 독하게 잊으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방법이 없으면 독하게 죄를 지으면서라도 살아가리라.
그때였다. 머릿속 가득히 산이 짖는 소리가 총알 박히듯이 들려왔다. 왈왈왈왈. 새끼 낳았을 때 나를 향해 무섭게 짖던 산이 소리. 왈왈왈왈. 왈왈왈왈. 잎을 크게 벌리지 않고 찢을 듯이 옆으로 벌리고 짖는 소리. 왈왈왈왈. 너도 한번 짖어 봐. 이렇게 너도 짖어봐. 때론 사랑하는 사람한테도 짖어야 해. 얼른. 얼른 짖어. 왈왈왈왈 왈왈왈왈 왈왈왈왈.....
나도 모르게 산이가 빙의된 듯이 서영이를 향해 입이 찢어진 것처럼 옆으로 벌리고 사납게 짖었다.
왈왈왈왈....
“왜 별안간 개 소리를 내?”
서영이가 내게서 몸을 떼며 말했다.
아! 나도 서영이를 향해 이렇게 짖을 수 있구나. 막상 짖고 나니 쾌감 비슷한 것 까지 느꼈다. 난 더 큰 소리로 짖었다. 난 그녀가 시키는 것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그녀가 얼굴을 내밀면 핥고, 그녀가 가랑이를 벌리면 섹스를 하고, 떠나라 하면 떠났다. 이렇게 거역할 수도 있는 거구나.
왈왈왈왈.
서영이를 향해 물어뜯을 듯이 짖었다.
“미쳤어?”
서영이 소리쳤다.
“ 미친 건 너야.”
“ 뭐라고?”
“미친 건 너라고.”
“ 왜 그래. 너 나 사랑하잖아”
“ 내려 ”
“ 여기서?”
“ 내가 물어 죽이기 전에 얼른 내려! 앞으로 내 눈앞에 나타나면 물어 죽인다. 차 버릴 땐 언제고 이렇게 살자고 그래!”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는 서영이에게 산이처럼 이빨을 드러내 보였다. 서영이가 겁에 질려 차 문을 열고 내리며 말했다.
“난 집에 가는 길을 몰라. 택시 탈 수 있는데 까지 만이라도 데려다 주면 안 돼?”
그녀가 애원했다.
나는 대답대신 문을 닫고 힘차게 액셀을 밟았다. 백미러로 그녀가 똥마려운 사람처럼 안전부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위로 희뿌연 달빛이 쏟아졌다. 맙소사! 저것이 서영이의 마지막 모습이라니! 달빛아! 너 좀 꺼져 주면 안 되겠니!
기분은 더럽지만 내가 대견했다. 잘 한 거야. 이번에는 울지도 않았다. 내가 제법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서영이 너를 못 보낼 것 같았어. 이것이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야. 나는 도둑질을 하고 살아도 괜찮지만 서영이 넌 그렇게 살면 안 돼. 꼭 행복해야 해. 이제야 너를 떠나보내는구나. 안녕 내 사랑.
이럴 때 난 어떻게 해야 하나. 아! 영준이가 있었지. 나는 차를 길가에 붙이고 영준이에게 전화를 했다.
“ 나야 ”
“웬일이야. 문자도 씹고 전화도 씹더니..... 이렇게 전화하는 걸 보니 괜찮아진 거 같네.”
“ 그냥 그래.”
“ 난 일 년이 갔어. 너도 당장을 괴로울 거야. 그런데 말이야. 이런 말이 네게 위로가 될 진 모르지만 말이야. 이별이란 때로 좋은 것도 있어. 말하자면 너에게 맞는 사람을 새로 만날 수 있다든가 네게 맞는 일을 새로 찾을 수 있다든가 하는.....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 친구와도 만날 수 있고.....너 서영이 만날 땐 우린 만나지도 못했잖아.”
“ 어떤 애야. 내게 딱인 여자애가.....”
“ 중장비기사라니까 멋지겠대. 시골에서 농사짓는다고 하니 그것도 너무 좋대. 유기농으로 농사져서 먹으면 좋겠다고. 미모는 서영이보다 좀 떨어지지만 까칠하지 않고 착해.”
“중장비 기사가 멋지다는 여자애도 있어?”
“ 이 세상에 여자가 서영이만 있는 것이 아니야.”
세상에 여자가 서영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다니 내가 참 못났다. 영준이와 소개팅 날짜를 잡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별의 노래를 잔뜩 선곡해 놓은 메론을 블루투스에서 차단하자 fm에서 어떤 음악인지 막 끝나고 있었다. 자기 눈에는 당신의 가슴에 박힌 그것이 보이는데 자기 음악방송에 놀러 오면 그 허전함 불안함 분노 그런 것을 뽑아 줄 수 있다고 촉촉한 목소리로 말하는 여자 DJ의 멘트가 시작되었다.
“오늘 하루 무척 추우셨죠? 지구 온난화로 인해 몰려온 북극한파라네요. 늦가을과 겨울이 만나는 11월 하순의 추위는 겨울철 보다 더 춥게 느껴지지요. 이것은 우리 몸이 미처 추위에 적응할 준비가 덜 상태에서 맞이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어쩜 우리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사랑하고 이별하는 그런 것에도 미리 적응할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다음은 수지에 사시는 김현준님께서 신청해 주신 김광석님의 <서른 즈음에>입니다.”
느린 기타 선율이 흘러나왔다. 두 장 남은 달력 끝에 겨우 매달려 있던 내 스물이 서서히 안녕을 고하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점점 더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안녕! 내 청춘아! 네가 머물러 있지 않아 얼마나 다행이냐. 다가오는 서른은 지금보다는 덜 아프겠지. 첫추위에 고꾸라지는 놈들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어. 느린 노래 속에서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설사 또 다른 이별이 온다 해도 지금보다는 덜 아프겠지. 잘 가라. 내 스물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