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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첨단 아파트에 입주했다

조선오이 2008. 7. 19. 19:33

이사를 했다.

집을 보러 다닐 때는 차가 들어갈 때마다 차단기가 내려오더니 주민이 되자 그냥 통과다.
차량에 부착된 주민인식표가 주민임을 알아준다.
경비실도 경비도 없다.
텔레캅 직원 옷을 입은 젊은이가 혼자 외부차량을 단속한다.
1층과 2층은 모두 주차장이다.
우린 2층이니 다른 아파트 4층인 셈이다.
현관에 들어오기 까지 내가 가는 곳마다 불이 저절로 켜지고 저절로 소등된다.

물이 안나와요, 하고 관리소에 전화하자 직원이 나와 물켜는 법과
화장실 변기 내리는 법등을 가르쳐 준다.
터치식에 익숙치 않아 물 틀 때마다 옛것이 그립다.

이전까지 손때가 묻어 더 소중했던 것들이 필요없어 딸 주고 왔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며 주신 사연많은 장롱을 비롯해
모든 장소마다 수납장들이 부착되어 있어 대부분 버려야 했다.
부엌의 까스렌지와
빨래 삶거나 곰국 끓일 때 쓰는 다용도실 보조 까스렌지
식탁 옆에 전기 레인지까지 쓸데없이 설치가 되어있어
내게는 이 모든 것이 과잉 친절같고 불편하기만 하다.

전화가 오면 온집안이 시끌시끌하다.
거실이며 화장실에서 까지 이상한 소리가 울린다.
처음에는 까스 경보기가 울리는 줄 알았다.
아직까지 그것들 쓰는 것에 익숙치 않아 예전에 쓰던 전화기 하나만 사용한다.

현관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는 방법은 네가지다.
이전처럼 신발장을 지나 들어오는 방법과
부억으로 직접 통하는 방법과
창고를 통해 부엌으로 들어오는 방법 뒷베란다를 통해 안방으로 직접가는 길이 있다.
우리 엄마는 방 잊어먹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한다.
누가 나가는지 들어오는지 서로 모른다.
애들이 숨밖꼭질 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어두운 집 마루에 묻혀 있던 가죽 쇼파가 거실에서 번쩍번쩍 빛을 낸다.
마당에 묻혀 있던 화초들도 이곳에 놓이니 비로서 자리를 찾은 듯 빛난다.
폐기처분하고 오려고 했던 고가구도 이곳에 오니 고풍스럽다.
쓰레기 같기만 했던 백자며 청자도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다.
하찮은 물건들도 자리에 따라 묻혀 버리기도 하고 빛나기도 한다.
하물며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여지껏 나는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이켜 보았다.
폐기처분하고 오려 했던 고가구의 모습임이 틀림없다.
언젠가 저 가구처럼 찬란하게 빛을 보면 다행이지만
별 뽀족한 수가 없으니 아마도 이대로 살다가 폐기처분 될 것 같다.

인생의 마지막 3막의 첫발을 내딛은 지금,
번쩍번쩍한 욕조가 딸린 침실과 벽면 하나가 다 신발장인 현관과
손 하나만 뻗치면 다 해결이 되는 동선의 부엌이 지금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오래전에 김한길이 쓴 <미국일기>를 읽었었다.
이어령씨 딸이 이혼하자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릴 때 피아노가 무척 갖고 싶었어요.
허지만 지금 나는 피아노가 필요하지 않아요.
당신은 지금 내게 피아노를 주고 있어요."

모든 것은 때가 있다.
멋진 욕조가 딸린 침실을 부러워하던 시절은 이미 다 지가가 버렸다.
이곳에서 할 일은 주말이면 아이들 기다리는 일 뿐일 게다.
최첨단 아파트에 앉아 가 버린 시절을 생각하니 새록새록 내 인생이 다 아쉽다.